거의 한 달 만에 작업실에 나갔다. 나갈 준비를 하면서 비로소 화분 생각이 났다. 이럴 수가! 다 죽었겠다! 전시 때마다 화환을 정중히 사양해도 또 몇 개쯤 늘어있는 게 화분이다. 꽃 죽이는 거 싫어서 잘 안 키우는데, 그래도 내게 온 건 열심히 키우는 편인데, 잊어도 너무 잊었다.
어제 그제 연 이틀 유채꽃 소식을 들었다. 축제 소식이 아니고 유채꽃밭을 트랙터로 밀어버렸다는 뉴스였다. 축제를 취소해도 계속 밀려드는 상춘객 때문에 불가피한 결정이었단다.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벚꽃 축제도 취소하고 벚꽃길 출입도 통제하고 거기까지는 당연했는데 유채꽃밭을 밀어버렸다는 소식은 조금 의외였다. 코로나 19로 사회 문화 경제 모든 부분에 변화가 오겠구나 어려움도 있겠지만 비약적인 발전도 있겠구나 세계도 달라지겠구나 많은 것을 추측해봤지만 꽃들의 수난 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각성이 은근히 피곤하다. 조심하는 마음 없이 우르르 밥 먹으러 가고 침 튀기며 수다 떨고 손잡고 꽃놀이도 가고 싶다. 특별할 거 없는 일상이 그리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브런치에 올라온 코로나 19 관련 글을 읽으며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하구나 생각한다. 이 불편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며 애써 좋은 점을 찾아보려는 노력 때문이다. 코로나 19 덕분에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책 읽는 시간이 많아졌고 공동체와 시민의식에 대해 생각하고 무엇보다 별일 없는 일상의 반복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 잃어버린 영혼/ 올가 토카르축 글/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이지원 옮김/사계절-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그림책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영혼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일을 아주 많이, 빨리 하며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영혼의 부재를 깨닫고 영혼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방법은 조용한 공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앉아 영혼을 기다리는 것. 왜냐면 주인공이 영혼을 잃어버린 이유가 영혼이 움직이는 속도가 육체보다 아주 느려서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코로나 19라는 불청객 덕분에 의도치 않게 영혼과 육체의 균형을 찾는 시간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올가 토카르 추크의 첫 그림책이다. 올가 토카르 추크의 간결하지만 예리한 글과 요안나 콘세이요의 개성 있는 그림이 각각 두 개의 이야기를 끌고 가듯 따로 또 같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책이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어떤 곳으로 여행 온 기분이 든다.
봄꽃이 아무리 찬란해도 나는 꽃놀이 대신 당분간 이런 책이나 읽고 지내련다.
P.S 작업실의 화분은 다육이와 홍콩야자 아레카 야자는 무사했지만 서양란과 제라늄은 사망하셨다. 남의 밭에 유채꽃 걱정이나 하면서 내 작은 화분들은 돌보지 않았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