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글
신영복교수의 글을 무겁다. 의미도 무겁고 문장도 무겁고 울림이 있어 또박또박 읽어야 한다. 무겁게 읽어도 글을 줄이기 어렵고 줄이는 것조차도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 교수님 책은 축약된 것보다 가급적 원본을 읽을 것을 권한다.
책머리에
이 책에 실린 글은 1995년 11월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짧은 글이라 어차피 많은 것을 담을 수도 없고 담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화두를 던지듯 쓰고자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군데군데 소용도 없는 욕심을 부린 곳이 눈에 띄어 민망스럽습니다.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릴 것을 그랬습니다.
그림도 글 쓰는 사람이 그린다면 글에 못다 담은 것을 보충할 수 있겠다 싶어서 무리인줄 알면서도 직접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이 오히려 글을 더 어렵게 하거나 다른 것으로 데려가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
인체 해부가 국법으로 금지되었던 시절, 스승은 얼음골로 제자 허준을 불러들였다. 스승의 부름을 받고 찾아간 허준의 앞에는 왕골자리에 반듯이 누운 채 자진한 스승의 시체와 시체 옆에 남겨진 유서가 황촉 불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병을 다루는 자가 자기 신체의 내부를 모르고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에 병든 몸이나마 네게 주노니 네 정진의 계기로 삼으라고 적은 유서. 그 앞에 무릎 꿇은 허준, 의원의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 구하기를 게을리 하거나, 이를 빙자해 돈과 명예를 탐하거든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맹세한 다음 스승의 시신을 칼로 가르던 허준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허준의 이야기는 소설가가 그려낸 상상의 세계이며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진실’임에는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사실이라는 그릇은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언제나 작고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처절하게 승계하는 현장에서 나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의 엄정함 하나만으로도 가슴 넘치는 감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 배우고 가르치는 이른바 사제의 연쇄를 더듬어 확인하는 일이 곧 자신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일몰 속에서 내일의 일출을 바라봅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읽어준 이 간결한 글만큼 지식인의 단호한 자세를 피력한 글을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향하여 푸르게 깨어있는 정신이야말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을 가리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고 생각됩니다.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이곳 하일리로 찾아오는 당신의 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모의 바닷가에서 새해의 약속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
현대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이란 인간적 품성이 도외시된 ‘경쟁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한마디로 숨겨진 칼처럼 매우 비정한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의 품속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소망이 과연 어떤 실상을 갖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편안함’ 그것도 경계해야 할 대상 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수많은 소리와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며 어딘가를 희망하는 잠들지 않은 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