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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8. 파라가스해변의 헤어질 결심

오늘은 통영 아닌 눈부시게 화창한 ‘Faragas Beach’에서

by 물가에 앉는 마음

네덜란드에서 허리를 삐끗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벤치에 앉아있을때 제복 입은 친구가 오더니 네덜란드어로 뭐라 뭐라 한다. 처음에는 경찰인 줄 알고 놀랐다. 천천히 다시 말해달라고 이야기하며 등받이 경사가 심한 벤치에서 급하게 일어나다가 비틀하며 허리를 삐끗했다. 제복 입은 경비원은 ‘관람 종료시간이 되었으니 출입문으로 퇴장’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런...

오늘은 ‘Faragas Beach’를 간다, 스케줄러가 구글을 열심히 검색하더니 주차장부터 해변이 가까운 곳을 찾아냈다. 부실한 아빠를 배려하느라 스케쥴러가 열일한다. 대신 아빠는 안전하게 운전해 주느라 신경 쓰고 있단다.


산에 나무가 많지 않고 교회는 하얀색건물이라 눈에 금방 띈다. ‘Faragas Beach’로 가는 도중 높은 산 중턱에 그리스교회가 있어 차를 돌렸으나 교회 문이 닫혔다. 차에서 내려 주위 풍경을 보니 멀리 바다가 보이고 마을도 보인다. 산 중턱에서 세속을 굽어보며 수도하기 좋았겠다.

시내에 그리스교회도 있지만 금선사나 수종사처럼 산속에 위치해 있는 교회도 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그리스는 골이 깊지 않고 숲도 우거지지 않아 교회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옛날 열악했던 교통사정을 감안하면 아마도 일반 교인들이 주말마다 예배를 보는 곳이기보다는 수도원이라 해야 맞을듯하다.


‘Faragas Beach’ 내려가는 언덕에서 보이는 뷰가 멋지다. 뷰가 좋아서인지 수영장 딸린 저택들이 여럿 된다. 멋진 해수욕장이 옆에 있는데 굳이 수영장이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들만의 세계를 이해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물과 과일, 과자를 갖고 왔고 그늘막 텐트 치고 있으니 어릴 적 생각도 난다. 벌써 5~60년이 지난 까마득한 세월이다. ‘Faragas Beach’는 경사가 완만해 멀리 나간 사람도 수심이 허리춤밖에 되지 않는다. 잠깐 발을 담그니 물 온도가 좋다. 뜨듯함과 시원함의 중간이다.


오늘도 날씨가 좋다. 해수욕하는 사람보다 선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해를 보지 못해 환장한 사람들이 많은 듯 모두 벌거벗고 햇볕을 쬐고 있다. 아마도 그리스 국민들은 비타민D가 과잉이라 약국에서 비타민D는 팔리지 않거나 만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소풍 왔으니 갖고 온 음식을 풀었다. 오는 길에 아이가 작은 무화과열매를 하나 땄는데 꿀맛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무화과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곳에 와서 먹어보니 매력 있다. 꽃과 과일색상은 원색이다. 능소화, 무궁화, 협죽도는 모양이 같아도 색은 짙다. 사과도 탐스러운 붉은색이지만 맛은 푸석하다. 새빨간 핏빛 자두는 당도가 높으며 농후한 맛이다. 청포도는 당도가 높아 포도주 담그면 아이스와인만큼 달콤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당도는 높지만 한국과일에 비해 산미가 떨어져 상큼함은 적은 것이 단점이다.


그늘막텐트 속에 누웠다. 이어폰에서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안개’ 정훈희 노래, 송창식 피처링으로 영화 ‘헤어질 결심’의 삽입곡이다. 희뿌연 날, 통영 바다 보이는 언덕에서 막걸리 한잔 기울이며 듣고 싶었던 노래다. 오늘은 통영 아닌 눈부시게 화창한 ‘Faragas Beach’에서 듣는다.

연배 있는 정훈희가 노래하고, 무심한 송창식이 피처링하지 않으면 헤어질 결심이 서지 않을 듯하다. 이제는 술 먹는 나날들과 헤어졌고, 기름지고 달고 짠 음식과도 헤어졌다. 좋아하는 해산물뿐만 아니라 過食(과식)과도 헤어져야 하고 갖고 있는 많은 것과 헤어져야 하며 결심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헤어져야 한다.

잔잔하게 들리는 파도소리와 노랫소리가 잘 어울린다. 낮이 아닌 캄캄한 밤에 듣고 눈물 찔끔 흘릴걸 그랬나? 타인 앞에서 강해 보이려는 수컷본능이 강해 눈물 없는 듯 지나치게 쿨한 것도 단점이다. 이것과도 헤어져야 한다.


안개(정훈희 노래, 송창식 피처링)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아

~아~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나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돌아서면 가로 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다오

아~아~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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