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은 자유의 최고치입니다.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당신은 유적지를 돌아볼 때마다 사멸하는 것은 무엇이고 사람들의 심금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돌이켜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새로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라고 하였습니다. ‘과거’를 읽기보다 ‘현재’를 읽어야 하며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광화문의 동상 속에는 충무공이 없습니다.
당신은 광화문 네거리에 서있는 충무공 동상 속에는 이순신장군이 없다 했습니다. 부릅뜬 눈으로 큰 칼 짚고 서서 경복궁과 청와대를 지키는 일을 이제 그만두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해 이곳에 왔습니다. 과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 있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의 모습이 언제나 수많은 백성들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불바다에서 호령하고 있을 때에도,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에도, 그리고 옥에서 풀려나와 폐허가 된 軍陣(군진)으로 돌아올 때마저도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함선을 만들고 수리하는 사람, 활을 만들고 화약을 만드는 사람, 적의 움직임을 알려오는 사람, 바닷물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 둔전을 일으키고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군량을 만드는 사람…. 그는 언제나 사람들로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글을 다시 읽습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서 있는 偶像(우상)은 사람들을 격려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의 본질은 抑壓(억압)이다.’ 천재와 偉人(위인)을 부정하는 당신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광화문의 동상 속에 충무공이 없다는 당신의 말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힘을 이끌어 내는 사람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산섬을 떠나오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상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가 발견해야 할 수많은 사람과 땅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빼어남보다 장중함을 사랑한 우리 정신사의 ‘지리산’(남명 조식)
금강산은 빼어나긴 하나 장중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고 합니다. 금강산은 그 수려한 봉우리들이 하늘에 빼어나 있되 장중한 무게가 없고, 반면에 지리산은 태산부동의 너른 품으로 대지를 안고 있되 빼어난 자태가 없어 아쉽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빼어나기도 하고 장중하기도 하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지만 산의 경우이든 사람의 경우이든 이들을 갖추고 있기란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秀(수)와 壯(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이 둘 가운데 하나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秀보다 壯을 택하고 싶습니다. 장중함은 얼른 눈에 띄지도 않고 그것에서 오는 감동도 매우 더딘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있음’이 크고 그 감동이 久遠(구원)하여 가히 ‘근본’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정보고속도로가 완공되면 우리의 삶은 통째로 이 도로 위를 질주하게 되리라는 예단마저 없지 않습니다. 엄청난 양의 정보는 불확실성을 줄여주고 우리세계를 무한히 확대해 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보 고속도로는 ‘거리’를 제거하여 우리의 생활방식, 취미, 사상까지도 바꿔낼지 모릅니다.
당신은 이러한 변화에 관하여 ‘거리’의 제거가 ‘인간관계’마저 제거함으로써 疏通(소통)이 경색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로를 달려 도착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더욱 걱정하였습니다.
오늘의 첨단과학은 인간이 어디로 향하여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없는 한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에 불과하다는 당신의 극언에 공감합니다.
자기가 땀 흘린 것이 아닌 것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는 우리시대의 집단적 증후군은 기본적으로 환상이고 그림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생활은 스스로 자기의 길을 만들어 나간다.’는 짧은 시구를 당신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얻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하는 한그루 나무인지 모릅니다. 옛 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는 경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 합니다.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어깨동무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평등은 자유의 최고치입니다.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무지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오랜 역사를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과 방향에 있어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자유는 언제나 더 큰 구속과 불평등을 동반함으로써 자유의 의미를 회의하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술과 문화소비마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욕구 그 자체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자본운동 속에서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더 큰 욕구 앞에서 목마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발전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유와 행복의 원리에 대한발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런 점에서 평등이 자유의 최고치라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