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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1)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1) (이근후著, 갤리온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프롤로그: 당신은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

50년 정신과 전문의로 은퇴한 뒤 나에게 감투를 주려는 단체들이 몇 군데 있었는데 모두 거절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딱 하나, 더 이상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다는 점이다. 자존심을 세워주는 그럴듯한 자리라도 나는 명예보다 즐거움, 책임보다는 재미를 택하면서 살기로 했다. 노년이 된 지금, 나는 심심하지 않게 잘 살고 있다.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을 꼽으라면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정신과 관련 교육과 상담은 물론 글도 올린다.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제일 재미있어 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뭐가 그리 억울한가.

노화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순응이다. 탤런트 김혜자씨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이 들어 불편한 것은 돋보기를 꺼내야 하니 책 보는 게 거추장스럽죠. 하나님은 다 좋은데 늙어서 눈은 나쁘게 하지 말지. 그걸 왜 그랬을까 곰곰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나이 먹어서 책을 보면 많이 알게 되고 그러면 앞에 나서게 되니, 그냥 뒤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눈을 나쁘게 했나 보더라고요.’ 보청기와 돋보기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라 젊어서 듣지 못했던 소리, 보지 못했던 세세한 것까지 보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고마운 물건이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생활이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책임도 의무도 줄어든다. 시간이 늘어나고 인내심도 많아지고 감정이 섬세해진다.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해보는 재미를 누리는 것도 좋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마다 신기하다. 세상을 떠난 선, 후배가 많은데 아침에 눈을 뜨면 ‘와! 눈떴구나! 하하하’하고 쾌재가 터져 나온다. 그 순간의 찰나적인 신비감이라니! 젊을 때는 이런 신비감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무모하게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나이 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보인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고 젊은 날을 아쉬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젊은 날에 알았다면 정말 내가 원하는 세상을 살 수 있었을까? 완벽한 삶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내 답은 ‘아니요’다. 시간이 지나야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청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청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년의 가장 큰 미덕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미래가 있다는 것 두 가지다. 그 무지함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된다.

열 살 때는 스무 살의 마음을 모르고, 30대에는 중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당연하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인간은 익어가는 것이다.


나이 드는 게 두렵기만 한 사람들에게

나이 듦의 상징은 육체적 쇠약에 있다. 나이 들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근육이 무르고 뼈가 약해진다. 거기에 한두 가지 병이 있다면 더더욱 노인답다. 그러나 노익장을 과시하는 사람들 앞에서 기죽거나 자책하지 마라. 또 나이 들어서도 젊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은 되도록 빨리 버려라. 24시간 젊게 보이는 데만 신경 쓰느라 삶을 돌보지 못하면 그게 더 안타까운 일 아니겠나.

나이 들면 해야 하는 일보다 안 해도 될 일이 더 많아진다. 혹 안 해도 될 일을 체면이나 다른 사람 말만 믿고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따져 보라. 그렇게 살아야 꼭 좋은 인생, 성공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의 인생에 절대 간섭하지 마라

부모 세대가 예순을 넘기면 곧 자식의 시대가 왔음을 상징한다. 집안에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시기다. 이즈음부터는 자식이 집안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부모가 연장자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부모 중심으로 맞춰서는 안 된다. 우주에도 자연계에도 메인 스트림이 있다. 우리 사회에도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 동력이 있으며 어떤 조직에서나 실세가 있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나이든 부모가 메인 스트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자식을 어떻게 키웠는지 아냐’며 억울해 하는 부모에게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쏟아 부은 정성을 희생으로 여기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억울해 한다. 부모가 의무를 다한 것이므로 희생한다는 것 자체가 착각이다. 그리고 자녀는 나의 분신이 아니라 갖고 있는 인격 수준대로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독립적인 단위다. 자식이 부모에게 독립하려고 애를 쓰듯, 부모도 어느 순간부터 자식에게서 독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동안 자녀를 돌보기 위해 소홀했던 자신을 돌보고 새롭게 펼쳐진 인생을 마음껏 누려야 한다.


젊은이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

중국 속담에 ‘가족 가운데 노인이 있다면 보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에는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에 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런데 시대가 달라져 젊은이들은 피라미드 벽화에 적힌 이상한 글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낼 수도 있다. 광속과 같은 변화의 속도에 빠르게 적응하며 삶의 방법이나 양식을 개발한다.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나이든 사람과 젊은이를 가른다.

‘젊었을 때는 말이야’ 하면 까칠한 반응만 돌아온다.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 젊음의 특징이다. 나와 같은 노인 세대는 전쟁과 가난을 겪으며 고생했지만 이는 훈장이 아니다.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다. 단지 우리 세대가 만난 시대적 어려움이었으며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뿐이다. 물질과 문화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전쟁과 가난 극기와 인내 등을 이야기한들 따분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꿈과 공부, 경쟁과 상대적 가난, 인간관계, 연예와 취업에 스트레스를 받고 살고 있다. 가난과 이념의 공포가 아니라 다른 면의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힘들고 불안하고 어렵고 두려움에 찬 시기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시기를 지나가야 한다. 특정한 시대라서 더 불안하지 않다.

젊은이들은 스스로 답을 찾아가고 깨우치고 자기만의 삶의 대안을 찾아가야 옳다. 나이든 사람이 젊은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것은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너희도 이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잘 하고 있다.’는 격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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