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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2)

(김욱著, 리수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인생 후반부 살림은 새로운 직업이다.

수십 년간 월급을 받아먹고 살아왔지만 남자들에게 일은 그야말로 생명이다. 일이 인생의 최우선이라는 각오로 40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그 외의 생활은 전부 아내가 맡았으며 남자니까 그래도 된다고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시대가 변해 예전같이 살아서는 안된다고 경종을 울리나 눈앞의 현실은 여간해서 움직일 생각이 없다.

일에 모든 체중을 걸어왔다는 것은 그 일이 그의 인생을 떠받쳐주었다는 뜻이다. 퇴직과 동시에 인생의 지주를 잃는 꼴이다. 그런데 여자는 다르다. 직장을 다녀도 일이 최우선이라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육아나 가사, 이웃과의 접촉처럼 다양한 현실을 동시다발적으로 관리한다. 일은 그녀의 생활을 지탱해 주는 기둥 중의 하나에 불과하므로 기둥 하나가 쓰러졌다고 해서 지붕이 무너질 염려는 없는 것이다.


퇴직 1년 된 후배가 차 한잔 하자며 전화했다. 2년 전 여러 고민을 토로하던 그의 모습은 곧 죽게 생긴 중환자의 몰골이었으나 표정이 밝고 안색도 좋았다. 젊음을 되찾은 사람처럼 목소리도 자신만만하다.

‘어떻게 지냈어?’

‘집안일은 모두 내가 하고 있어요. 내가 쉬니 집사람이 일을 구해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식사, 설거지도 다합니다. 집안일은 시간이 꽤 걸리는데 집안일 끝나면 영화도 보고 블로그에 글도 써요. 그러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요. 살림은 생각보다 힘들지만 요리는 재미있고 설거지도 제법 즐거워요.’


인간이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에 멋지다.

‘황혼이혼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제수씨가 많이 놀랐겠어?’

‘어쨌든 점수 땄죠. 이젠 걱정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지금껏 살아온 대로 일상까지 아내에게 의지했다면 그의 아내는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후배가 가사를 나눠 가짐으로써 가정을 평안하게 건사했고, 이는 돈 버는 일보다 큰일 일 수 있다. 후배는 위기를 깨닫고 피해 갈 수 있는 지혜를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매우 유연한 사람이다.


어느 대학에서 고령자를 위협하는 위험 요인을 조사 발표한 적이 있다. 담배, 술, 스트레스를 예상했으나 남자는 아내의 죽음, 여자는 은퇴한 남편이었다. 말인즉슨 남편의 목숨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아내의 죽음이며, 아내의 목숨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집에서 놀고먹는 남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에게 불리하고 난처한 결론이다. 그래서인지 집사람도 내가 조금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있을 때 잘해’라는 말로 내입을 막아버린다. 이상한 것은 ‘있을 때 잘해’라는 말만 들으면 몸에서 기운이 쭈욱 빠져나가면서 할 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자족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도 사람이지만 사람만큼 기괴하고 기발하고, 겪어도 겪어도 이해 안 되는 생물은 없는 것 같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게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여름이 오면 겨울이 좋다 하고 겨울이 오면 여름이 좋다고 벌써부터 그리워한다.

살찐 사람은 말랐으면 좋겠다고 노래하며 나같이 마른 사람은 살이 찌고 싶다고 가족을 들들 볶는다. 바쁠 때는 놀고먹는 백수가 부럽고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정작 하릴없이 놀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원 없이 일하다 죽어보는 게 소원이 된다. 빌린 우산도 비가 그치면 방해가 된다.

인간은 원래 제멋대로다. 그러나 그것도 도가 지나치면 허준이 살아 돌아놔도 치유불가능한 교만이 된다.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껴 본 지 오래되었다 의식주는 옛날에 비하면 천국이지만 위를 보며 분노하고 옆을 보면 분노가 쏟아진다. 왜 저들처럼 살지 못하나. 내겐 왜 그것들이 없을까. 욕심내고 자학하고 마지막에는 포기하며 방치한다.


미국의 어느 정신과 의사가 했던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것은 평생토록 할 수 있는 일을 갖고 있을 때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인격을 상실했을 때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나를 볼 때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은 타인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생색내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들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거짓말을 해야 할 때다.


진정한 富饒(부요)는 내 마음속에 있다. 육신보다 정신이, 정신보다 영혼이 부자여야 되는 것이다. 진짜 부자는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길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큰 부자다’라고 했다.

인간 행복의 척도는 물질적 재산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천지에 재벌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 돈 잘 버는 연예인들도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재벌회장이 복도 창문을 통해 투신하고 연예인들은 우울증 아니면 공황장애다.


세네카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돈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부자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스스로 자족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권력은 없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스스로 불행하게 여기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신은 없다.

자족은 정신훈련으로 내면을 가꾸는 훈련이다. 유럽 어느 수도원 대문에 이런 글귀가 있다. ‘머무시는 동안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불편해도 참아내는 법, 필요한 게 있어도 그것 없이 사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멋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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