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7. 풍요로운 삶

한 박자 쉬고 내 삶을 찾아볼 것인가?

by 물가에 앉는 마음

버리고 비우니 아파트가 넓어졌다. 시집간 큰아이와 외국에 있는 작은아이 짐을 정리했다. 안방은 놓아두고 아내와 나는 아이들 방에서 살고 있다. 견우직녀처럼 여행과 식사할 때 만나고 이내 헤어진다. 의견대립이나 싸울 일 없어 좋다.

인생에서 음식 먹는 재미와 행복도 크다. 단짠과 멀어지니 행복이 작아졌지만 슴슴한 맛에도 행복은 있다. 건강을 위해 아침식사는 지중해식 샐러드를 먹는 것이 생활화되었다. 단짠의 매력과는 멀어졌으나 강열한 매움과 새콤함과는 친해졌다. 먹다 보니 단짠을 대신할 수 있는 맛이다.

직장 다닐 때도 양복 입는 것을 싫어했다. 社規(사규), 服制規定(복제규정)에 “혹서기를 제외하고 넥타이를 착용...” 이란 문구도 무시하며 시말서를 쓰기도 했다. 나이 들수록 고급스럽고 깔끔하게 입고 다녀야 한다고 아내가 잔소리하지만 이것은 양보하기 어렵다. 아내가 질색해도 편한 옷을 입고 다닌다. 청바지를 주로 입지만 청바지가 어색한 장소에는 블랙진을 입고 간다. 자주 만나는 분들은 예의 갖춰 입고 왔구나 생각해 주면 서로 편하다.


지극히 평범한 은퇴자의 삶을 단편적인 부분만 이야기했기에 많은 부분이 빠져 있다. 인간이 죽기 전까지 움켜쥐고 싶으나 놓고 싶어 하지 않은 “돈, 명예, 지위(권력)”에 관한 부분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평범한 은퇴자의 삶에서 의식주 걱정이 없으니 현재의 삶이 행복한가? 물으면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思秋期(사추기)를 거치며 철이 들었다. “돈, 명예, 지위(권력)”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희미하게나마 생각했으나, 요즈음에는 확신이 생겼다.


사실 많은 부분을 내려놓으니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다. 2007년 승진을 앞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는 정신적으로 많이 소진된 상태로 무엇인가 상황을 바꿀만한 계기가 필요한 시기였다. ‘진급할 것인가? 아니면 한 박자 쉬고 내 삶을 찾아볼 것인가?’ 고민 끝에 후자를 택했다.

후자를 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진급했다가 강등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기업 초유의 일이었지만 한번 겪어보니 진급이란 것이 인생에서 커다란 이슈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급에 목매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1년 동안 사외교육받으며 인생공부를 했고, 내면을 다지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남들에게 양보도 하고 배려하는 자세도 배웠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방식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마음이 편해지고 대인관계도 부드러워졌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것을 내려놓자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물건을 버리니까 아파트가 넓어진 것처럼.


1500만 원짜리 샤넬백을 구입해서 들고 다니지도 못하고 애지중지하는 사람과 10만 원짜리 LEVI'S 550 relaxed taperd Fit Jean을 득템해 일상으로 입고 다니는 퇴직자 간의 만족감과 행복감은 누가 높을까? 샤넬백을 구입한 사람이 가격과 비례해 150배 행복할까?

부자에게 샤넬백은 커다란 행복이 아니기에 구입한 것 자체는 이슈도 아닌 평범한 일상이다. 오랜 기간 용돈을 모아 샤넬백을 구입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구입할 때 기쁨은 클 것이다. 구입 이후의 행복이란 자기만족과 진품 샤넬백을 들고 다니는 것을 타인이 부러운 듯 바라봐주는 것이다.

하지만 샤넬백을 들고 다닐 기회는 의외로 많지 않다. 캐주얼복장에 샤넬백을 들고 다니면 타인의 눈은 분명 ‘짝퉁’으로 볼 테니 ‘진퉁’이란 표딱지를 붙이고 다닐 수도 없고 말이다. 그렇다고 정장을 입을 때마다 똑같은 샤넬백을 드는 것도 이상하다. 큰마음먹고 비싼 값에 구매했으니 많은 사람이 봐줬으면 좋겠지만 스크래치 생길까 봐 만원사례 대중교통은 이용하기 어렵다.

행복은 强度(강도)가 아니라 頻度(빈도)다. 1년 통틀어 타인이 부러운 듯 바라봐주는, 그것으로 인해 행복한 頻度는 많지 않다. 10만 원짜리 LEVI'S 550 relaxed taperd Fit Jean을 입은 은퇴자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Jean을 입는다. 타인이 봐줄 리도 없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1년에 300일 정도 Jean을 입으니 1년 내내 만족해한다.


1500만 원짜리 샤넬백을 이기는 10만 원짜리 LEVI'S 550 relaxed taperd Fit Jean 이야기는 詭辯(궤변)인가? 샤넬백을 이기는 taperd Fit Jean이 여러 벌이다. 또한 여러 명품들을 이길만한 것들을 많이 갖고 있다. 충분히 풍요로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