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和而不同’은 몰라도 ‘따로 또 같이’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출전은 논어로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에서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和而不同’은 ‘같지 않지만 사이좋게 지낸다.’등 여러 가지 표현이 있겠지만 조금 점잖게 표현하면 ‘삶의 방향과 길은 다르지만 다름은 인정한다.’겠지요. 異民族(이민족) 국가인 미국이 위대한 국가로 탄생한 원인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장 노동자가 필요했다는 경제적 이유가 있었지만 ‘피부색이 달라도 동등한 인간’임을 인정한 ‘북군’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했기에 미국의 ‘다름’은 피로 쟁취한 가치이기도 합니다. 남북전쟁 이후 1870년 흑인참정권으로 얼굴색의 다름을 인정했고, 조금 늦은 1920년 여성참정권을 인정하여 性的(성적) 다름을 인정했습니다.
조직의 규모만 다를 뿐이지 대통령, CEO...마찬가지 리더입니다만 거리감이 있으니 우리 회사의 처장, 팀장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의욕에 넘쳐 새로 부임한 처장은 산하 조직이 잘못된 구습을 타파하며, 모든 직원들이 혁신의 길로 나가길 희망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길 원하여 드라이브를 겁니다. 회의시간도 바꾸고 일하는 방식도 바꾸려 합니다. 신임 처장의 지시이니 초기에는 먹혀들어가는 부분이 많아, 처장은 본인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혁신의 길을 순항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전체주의적 의식 하에 진행된다면 후유증이 바로 생깁니다. 기존의 질서, 문화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후유증이 발생되는 시기가 빨라집니다.
잘못된 부분은 개선해야 하지만, 무릇 리더는 다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릇’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름을 인정 하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니, 내 생각과 판단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고 리더의 부족함을 자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리더가 건강하고 강력한 조직을 키워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멸망하다시피 했는데 이것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은 철학과 조직의 한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모두 평등하게 잘사는’은 이론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자연계 현상하고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독재’라 불렀죠. 독재가 용인되었던 ‘성장 우선시대’, 그 이후는 다름을 인정하는 ‘자율의 시대’로 전환되어 교복, 두발자유화 바람이 불었습니다만 아직 ‘다름’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혼돈의 시대’로 보는 시각도 있겠지요.
왜 어려울까요? 미국의 ‘다름’은 피로 쟁취한 가치라 했지만, 미국의 ‘다름’은 아직도 ‘갈등의 원인’이기도 하니 쉽지 않은 화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나치게 ‘단일민족’, ‘단결’, ‘동일’함을 강조하고 추구하다보니 다름, 다양, 다문화에 대한 편견이 많은 것 아닌가 합니다.
열 손가락 중 아프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김새와 길이와 쓰임새는 제각각이지만 손을 이루는 것은 손가락이며 조화를 이뤄야만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여러 형제들도 개성이 제각각이지만 가문의 이익과 추구하는 방향을 위해서는 하나로 뭉칩니다. 손가락이 다름만 강조하고 화합이 없다면, 손이 화합만 강조하여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발생하겠지요. ‘다름을 인정하는 것’ 은 리더십의 문제이고 소속원 의식의 문제입니다. 화합을 강조하되 같음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和而不同’이요 ‘따로 또 같이’ 정신입니다.
논어의 원 문장은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자왈,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입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군자는 화합을 추구하되 같음을 강요하지 않고, 소인은 같음을 강요하되 화합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500년 전에 리더(군자)의 길과 통합방법을 제시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문화가 다른 ‘不同’의 세 개 조직이 통합되어 종합기술원이란 조직이 발족했으니 ‘和而’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화이를 위해서는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에서 ‘공유’를 찾아야 하며 서로 다름에 대해서는 ‘사랑’의 눈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 다름에 대해서는 사랑의 눈으로 인정해야 한다.’와 거리가 있을 듯 하지만 문득 나태주詩人의 ‘풀꽃’이란 詩가 생각납니다. 잘 보이지 않아 자세하게 오래보아야 하는 냉이꽃 같은 풀꽃은 소박하게 예쁘고 정겹기까지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세히 보면 예쁘고 정겨우며, 오래보면 사랑스럽습니다.
풀꽃
- 나태주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