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이철수著, 삼인刊)
어른이 된다는 건
삶의 껍데기는, 세상에서 늘 확인하는 대로, 한데 어울리고 작은 연고를 따라 엮여 살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촘촘하게 짜여진 관계지요. 자칫 이기적인 연줄이 되기도 합니다. 잘난 사람들의 유유상종을 어깨너머로 보기도 하고, 가끔 동참을 권유받기도 합니다. 그 흔한 띠모임 하나 들어둔 것이 없지만, 홀가분한 그게 좋아서 어느 모임이건 사양하고 삽니다. 나이 들면 외로워지겠구나 싶을 때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냥 이대로 살게 되지 싶습니다. 절로 생기는 인연도 감당이 어려운데 새 인연을 따라서 낯선데 끼어 있자면 그건 또 얼마나 힘들까 싶기도 하고요. 살아보면 인생은 외롭게 혼자인 게 제 모습인 듯합니다. 제 그림자건, 제 내면이건 제가 저를 길동무삼아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요.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혼자 걷는데 익숙해지고 태연해 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어려서 혼자 바깥변소도 못 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무섭던 어둠이 마음에 깃든 실없는 두려움 인 것을 알게 된 게 언제더라?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지요. 삶의 알속도 껍데기 인생 못지않게 정교한 인연인 것도 알게 되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마음은 늘 큰 걸음으로 건너뛰고 싶어 하고, 세상의 진창은 언제나 넓은가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물웅덩이 진창길을 에돌아가면 안 되나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서 뒷산으로 바람 한번을 쐬러 못 가느냐는 핀잔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 했습니다. 바삐 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면서...
인생의 그늘이 실감나는 나이
중년들이 다녀갔습니다. 조금 수선스럽고 소란스러웠습니다. 쏟아 낼 것이 많아서도, 반가워서도, 서먹해서도, 외로움이 있어 서로 그럴 테지요. 제가 끼어들 겨를도 없었고 이래저래 바라보는 처지로 반나절 보냈습니다. 주인이라는 사내가 예의 없었다고 하시지 않을지? 그런 걱정도 조금은 들었습니다. 하여튼 웃으며 헤어졌습니다. 오늘 든 생각은 아닙니다만, 중년이 눈길 주는 그 자리, 거기 무엇이 있건 위험하겠다 싶었습니다. 살만큼 살아보고 인생의 그늘이 조금씩 실감나는 나이가 되고 보면 마음에도 적당히 군살이 배기고 고삐도 좀 느슨해지기 마련입니다. 그 고삐도 죄고 제 살아온 길을 한번쯤 돌아보면 좋을 나이 이기도 하지요.
누구에게나 오는 길
누구에게나 이런 날이 오지요? 어느 날, 늘 오던 새날이 오시지 않아서 밖에 조등이 내걸리고 살아있던 나를 두고 인연 있던 이들이 모여들어 이야기하는 그런 날! 가까운 형님 댁에서 십육칠 년쯤 기른 늙은 개가 무가 풀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감쪽같이 풀려서 어디론가 떠났다고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논에서도 보고 산 밑에서도 보았다는데 끝내 못 찾았다네요. 제 죽을 자리를 찾아서 집을 떠났는가 보다는 게 결론입니다. 아마 그랬을 성 싶습니다. 늙은 동물은 자못 영물이지요. 저 죽을 때를 알고 저 누울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그리 특별하달 것도 없습니다. 겨울 어느 날, 아늑한 산골짝에 조용히 엎드려서, 식음을 폐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작은 짐승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그 자리를 찾아 천천히 걷는 짐승의 뒷모습도 아름다웠을 터입니다. 그리고 보니 사람의 임종은 그만큼 의젓하기 어려운 듯합니다. 존재를 깊이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아직은 눈 내려 주시고
설경이 추억이 될 거라고 했는데, 아직은 현실이라고 말씀하시는 듯 폭설이 내리고 있습니다. 눈 그치고 나면 그때나 치우자하고, 그저 바라보고 있습니다. 좋네요. 봄이건 새순이건 꽃이건 올 것은 오겠지요? 자연은 때를 놓치는 법이 없고 사람의 마음은 제멋대로 춤을 춥니다. 다행스러운 건 몸이 자연에 속한 것을 스스로 알아서, 나고 자라서 늙어가는 걸음을 늦추거나 바꾸지 않는 거지요. 갈수록 눈발이 굵어집니다.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내려 놓을 것 다 내려놓고 싶으신가 봅니다. 폭설 덕분에 황사먼지는 많이 가라앉겠습니다. 종일 눈 구경이나 하고 싶은데 오늘도 약속이 있고 살자고 하다 보니 바삐 지내는 터이지만, 눈비 구경을 마음 편히 못하다니!
궂은 날도 죽기 살기로 화사한 꽃처럼
꽃들은 죽자고 꽃대를 밀어 올리고, 그 끝에 마음인 듯 피워 내는 화사한 얼굴로 흔히 제 이름을 삼지요. 궂은 비 이어지는 계절에는 그 화사함이 빛바래기도 합니다. 좋은날 못보고 스러지는 거지요. 그렇다고 꽃 아니라 할 수 있나요? 꽃이 그러하듯 우리 삶도, 비오시고 눈 내리고 궂은날 갠 날이 있지만 엄연한 한 생애 일겁니다. 쉽게 마음 접지 마시고, 힘내시기를... 궂은 날도 죽기 살기로 화사한 꽃처럼, 당신이 그렇게 아름다우시길
살면서 버려야 할 것
살면서 버려야 할 것이 있겠지요? 무엇보다, 관념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관념? 쓸데없는 생각의 무늬 같은 거지요. 얼핏 아름답고 솔깃하지만 핏기는 없는 언어들, 거기서는 땀 냄새 흙냄새 맡기 어렵습니다. 정직하지 않은 말, 뜬 구름 잡는 이야기, 삶의 실감과 먼 이야기. 몸뚱이가 밥으로 기운을 얻듯 마음은 몸 움직이는 삶에서 자양을 얻습니다. 살아가는 게 건강하지 못하면 마음 역시쓸데 없는 데로 흐르지요? 모르긴 해도, 그러지 싶습니다. 몸을 천덕꾸러기로 여기는 시대가 되어 버렸지요? 땀 흘리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세상입니다. 노동의 땀을 버리고, 헬스클럽에서 우아한 땀을 쏟으라는 세상. 남기 전에 버리는 낭비가 미덕이 되고, 낭비가 꿈인 세상. 비틀린 생각이 범람하기 안성맞춤입니다. 버릴 것이 관념만 아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