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이철수著, 삼인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어른이 된다는 건

삶의 껍데기는, 세상에서 늘 확인하는 대로, 한데 어울리고 작은 연고를 따라 엮여 살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촘촘하게 짜여진 관계지요. 자칫 이기적인 연줄이 되기도 합니다. 잘난 사람들의 유유상종을 어깨너머로 보기도 하고, 가끔 동참을 권유받기도 합니다. 그 흔한 띠모임 하나 들어둔 것이 없지만, 홀가분한 그게 좋아서 어느 모임이건 사양하고 삽니다. 나이 들면 외로워지겠구나 싶을 때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냥 이대로 살게 되지 싶습니다. 절로 생기는 인연도 감당이 어려운데 새 인연을 따라서 낯선데 끼어 있자면 그건 또 얼마나 힘들까 싶기도 하고요. 살아보면 인생은 외롭게 혼자인 게 제 모습인 듯합니다. 제 그림자건, 제 내면이건 제가 저를 길동무삼아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요.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혼자 걷는데 익숙해지고 태연해 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어려서 혼자 바깥변소도 못 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무섭던 어둠이 마음에 깃든 실없는 두려움 인 것을 알게 된 게 언제더라?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지요. 삶의 알속도 껍데기 인생 못지않게 정교한 인연인 것도 알게 되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마음은 늘 큰 걸음으로 건너뛰고 싶어 하고, 세상의 진창은 언제나 넓은가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물웅덩이 진창길을 에돌아가면 안 되나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서 뒷산으로 바람 한번을 쐬러 못 가느냐는 핀잔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 했습니다. 바삐 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면서...


인생의 그늘이 실감나는 나이

중년들이 다녀갔습니다. 조금 수선스럽고 소란스러웠습니다. 쏟아 낼 것이 많아서도, 반가워서도, 서먹해서도, 외로움이 있어 서로 그럴 테지요. 제가 끼어들 겨를도 없었고 이래저래 바라보는 처지로 반나절 보냈습니다. 주인이라는 사내가 예의 없었다고 하시지 않을지? 그런 걱정도 조금은 들었습니다. 하여튼 웃으며 헤어졌습니다. 오늘 든 생각은 아닙니다만, 중년이 눈길 주는 그 자리, 거기 무엇이 있건 위험하겠다 싶었습니다. 살만큼 살아보고 인생의 그늘이 조금씩 실감나는 나이가 되고 보면 마음에도 적당히 군살이 배기고 고삐도 좀 느슨해지기 마련입니다. 그 고삐도 죄고 제 살아온 길을 한번쯤 돌아보면 좋을 나이 이기도 하지요.

20220514_054758.jpg

누구에게나 오는 길

누구에게나 이런 날이 오지요? 어느 날, 늘 오던 새날이 오시지 않아서 밖에 조등이 내걸리고 살아있던 나를 두고 인연 있던 이들이 모여들어 이야기하는 그런 날! 가까운 형님 댁에서 십육칠 년쯤 기른 늙은 개가 무가 풀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감쪽같이 풀려서 어디론가 떠났다고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논에서도 보고 산 밑에서도 보았다는데 끝내 못 찾았다네요. 제 죽을 자리를 찾아서 집을 떠났는가 보다는 게 결론입니다. 아마 그랬을 성 싶습니다. 늙은 동물은 자못 영물이지요. 저 죽을 때를 알고 저 누울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그리 특별하달 것도 없습니다. 겨울 어느 날, 아늑한 산골짝에 조용히 엎드려서, 식음을 폐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작은 짐승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그 자리를 찾아 천천히 걷는 짐승의 뒷모습도 아름다웠을 터입니다. 그리고 보니 사람의 임종은 그만큼 의젓하기 어려운 듯합니다. 존재를 깊이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아직은 눈 내려 주시고

설경이 추억이 될 거라고 했는데, 아직은 현실이라고 말씀하시는 듯 폭설이 내리고 있습니다. 눈 그치고 나면 그때나 치우자하고, 그저 바라보고 있습니다. 좋네요. 봄이건 새순이건 꽃이건 올 것은 오겠지요? 자연은 때를 놓치는 법이 없고 사람의 마음은 제멋대로 춤을 춥니다. 다행스러운 건 몸이 자연에 속한 것을 스스로 알아서, 나고 자라서 늙어가는 걸음을 늦추거나 바꾸지 않는 거지요. 갈수록 눈발이 굵어집니다.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내려 놓을 것 다 내려놓고 싶으신가 봅니다. 폭설 덕분에 황사먼지는 많이 가라앉겠습니다. 종일 눈 구경이나 하고 싶은데 오늘도 약속이 있고 살자고 하다 보니 바삐 지내는 터이지만, 눈비 구경을 마음 편히 못하다니!


궂은 날도 죽기 살기로 화사한 꽃처럼

꽃들은 죽자고 꽃대를 밀어 올리고, 그 끝에 마음인 듯 피워 내는 화사한 얼굴로 흔히 제 이름을 삼지요. 궂은 비 이어지는 계절에는 그 화사함이 빛바래기도 합니다. 좋은날 못보고 스러지는 거지요. 그렇다고 꽃 아니라 할 수 있나요? 꽃이 그러하듯 우리 삶도, 비오시고 눈 내리고 궂은날 갠 날이 있지만 엄연한 한 생애 일겁니다. 쉽게 마음 접지 마시고, 힘내시기를... 궂은 날도 죽기 살기로 화사한 꽃처럼, 당신이 그렇게 아름다우시길


살면서 버려야 할 것

살면서 버려야 할 것이 있겠지요? 무엇보다, 관념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관념? 쓸데없는 생각의 무늬 같은 거지요. 얼핏 아름답고 솔깃하지만 핏기는 없는 언어들, 거기서는 땀 냄새 흙냄새 맡기 어렵습니다. 정직하지 않은 말, 뜬 구름 잡는 이야기, 삶의 실감과 먼 이야기. 몸뚱이가 밥으로 기운을 얻듯 마음은 몸 움직이는 삶에서 자양을 얻습니다. 살아가는 게 건강하지 못하면 마음 역시쓸데 없는 데로 흐르지요? 모르긴 해도, 그러지 싶습니다. 몸을 천덕꾸러기로 여기는 시대가 되어 버렸지요? 땀 흘리는 일을 부끄러워하는 세상입니다. 노동의 땀을 버리고, 헬스클럽에서 우아한 땀을 쏟으라는 세상. 남기 전에 버리는 낭비가 미덕이 되고, 낭비가 꿈인 세상. 비틀린 생각이 범람하기 안성맞춤입니다. 버릴 것이 관념만 아니겠네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555. 철학의 힘(3) (김형철著, 위즈덤하우스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