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慾이 老醜를 만든다고 하는데
古典(고전)에서 주문하는 사항들은 그리 무겁지 않으나 실천하려면 쉽지 않고 體化(체화)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타인을 바라볼 때 조금만 양보하면 되는데, 또는 욕심 부리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정작 본인이 동일한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양보하거나 욕심 버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본인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중적 잣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중적 잣대가 균형이 맞으면 좋으련만 욕심이 크면 클수록 한쪽으로 심히 기울게 된다.
어른들께서 말씀하신대로만 살아도 추해지지는 않을 듯하다. 고전으로부터 깨우침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오랜 삶 속에서 얻은 깨달음 내지는 삶의 철학과 경험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니 어른 말씀은 고전과 다를 바 없다. 또한, 고전이 아니더라도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오는 속담과 격언들이 후대까지 전파 된다는 것은 나름의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귀하고 군자처럼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적어도 추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 삶의 기준을 정하고 행동하지만 평가는 타인이 하기에 추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素書(소서)에 ‘욕심을 버리면 근심이 없어지며, 악행을 하지 않으면 허물도 없다. 작은 것을 탐하면 큰 것을 잃는다.’ 했다. 매우 간단한 가르침이며 쉽게 다가온다.
2001년, 회사 최고의 상을 수상하고는 다른 상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1년에 한 명, 업무 성과는 기본이나 ‘품행방정하고 남의 모범’이란 전제가 있었기에 수상 후 언행을 더욱 조심하게 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다른 상에 대한 욕심을 버렸지만 한편으로 근심거리처럼 되었고 조그만 실수도 허물이 될 듯 했기에 삶의 스트레스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회사 최고의 상을 타기에는 그릇이 적었지 않나 싶다.
철학을 노래하는 소리꾼 장사익씨의 ‘하늘 가는 길’은 장송곡이다. ‘간다 간다. 내가 돌아간다. 왔던 길 내가 다시 돌아를 간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잎진다 설워마라. 명년 봄이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한 번간 우리인생 낙엽처럼 가이없네. 하늘이 어드메뇨 문을 여니 거기가 하늘이라. 하늘로 간다네. 버스타고 갈까. 바람타고 갈까. 구름타고 갈까. 하늘로 간다네. 하늘로 가는 길 정말 신나네요.’
나이 들수록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문을 열면 거기가 하늘인데 오늘 당장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가볍게 해야 한다. 하지만 老慾(노욕)이 老醜(노추)를 만든다. 젊은 친구들의 욕심은 생각이 짧은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나이 들어 욕심을 부리면 익스큐스가 없고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노욕을 내려놓으라는 지적에 변명하게 되면 변명은 진화되어 거짓말로 바뀌고 결국에는 사람을 망가트려 老醜가 된다. 나이 들었어도 쿨하게 잘못을 인정하면 끝나는 사안을 알량한 욕심과 자존심으로 인해 인정하지 못하니 事端이 벌어진다. 나이든 어른이나 정치인들의 몰락은 老慾으로 시작해 老醜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문 열면 하늘인데 10억 재산가나 100억 재산가나 똑같은 부자임에 다름 없고, 9선 국회의원이면 어떻고 10선 국회의원이면 달라지는 것이 무엇일까? 하늘 문에 들어선 후에는 고작 墓碑銘(묘비명)만 달라질 뿐이며 현생의 행복과는 전혀 상관없는 타이틀이다.
‘욕심을 버리면 근심이 없어지며, 악행을 하지 않으면 허물도 없다. 작은 것을 탐하면 큰 것을 잃는다 했다.’라는 가르침은 素書(소서)의 求人之本(구인지본: 사람의 근본)에 나오는 구절로 의역하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잘못을 저지르기 쉬우니 小貪大失(소탐대실)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기본이다.’
요즈음 집사람이 나이 들면 추해보이지 않게 좋은 옷, 깔끔한 옷을 입고 다니라고 한다. 다림질이 필요 없는 청바지, 정전기 발생 없는 면셔츠, 10년 된듯 구깃구깃한 검은색 트렌치코트가 가격이 비쌀지 몰라도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집사람과 아이들이 사온 비싸고 상어 껍질처럼 매끄럽게 빠진 좋은 브랜드의 옷에 눈길이 가는 것을 보면 옷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가 보다. 老慾이 老醜를 만든다고 하는데 옷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