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2년간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야 하나 서둘지 않으려 한다.
타고난 역마살로 인해 새로운 조직에 가서 3년 정도 있다 보면 엉덩이가 들썩거려진다. 본사나 현장도 마찬가지로 3년이면 설비, 업무, 직원, 고객관계도 익숙해지고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자리를 옮기는 원인중 하나는 한 곳에 오래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어 내 자신이 나태해지는 꼴을 보지 못하는 못된 성격 탓도 있다. 1984년 입사한지 34년, 따져보니 고리, 울진, 영광, GT센터, 본사를 왔다 갔다 하며 11번 전근했고 마지막이 될 기술연구원이 12번째 임지이다. CEO와의 불화로 좌천되어 본사에서 먼 사업장에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집하고 가까운 인천으로 갔기에 좌천이 아닌 영전이라 우기며 정신승리했었다. 업무적으로 친정인 본사로 다시 복귀하니 감회가 더욱 새롭다.
GT정비기술센터에는 1년 반 밖에 있지 않아 사실 100명 남짓한 식구들 이름도 외우지 못하는 상태에서 전근하게 되었다.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보직을 놓아야 하며 집이 가깝다고 적자사업장에 눌러 앉아 있는 것은 선배 도리가 아니며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근이 잦은 회사다 보니 우리 회사 전반적인 문화는 가족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하고 가능하면 전근 다니지 않는 것 인데 나는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대부분 발전소가 벽촌에 있으므로 의료, 문화혜택은 빈약하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토속음식과 숨겨진 비경을 즐길 기회가 없을 것이니 이를 즐긴다는 마음으로 정을 붙인다면 벽촌도 살만하다.
전근 할 때마다 이사하는 것이 번거로우나 자주 다니다보면 승용차로 이사 다닐 수 있도록 살림살이가 최적화된다. 하지만 혼자 살아도 있을 것은 있어야 한다. 가끔 바삭한 토스트를 먹고 싶을 때가 있으니 토스터, 아무리 게을러도 청소는 해야 하니 청소기와 대걸레도 필요하고, 간편하게 고구마를 구울 수 있는 전자렌지는 누가 발명했는지 사용할 때마다 경의를 표하게 되지만 사용빈도가 낮아 이번에는 인천사택에 놓고 왔다, 1년 입어도 10년 된 듯한 옷을 좋아하나 외부 손님과의 회의 때는 구긴 옷을 입을 수 없으니 나주혁신도시에 세탁소가 없을 때 요긴하게 사용했던 다리미는 갖고 왔다, 기러기 아빠의 필수품 라면냄비와 달걀프라이용 팬은 갖고 왔고, 1달에 한번 쓸까말까 한 전기밥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버리고 왔다. 욕실용품과 사철 옷, 속내의와 양말은 충분하게 20켤레... 풀 퍼니시드 오피스텔에 가기에 냉장고, 세탁기, TV등 덩치 큰 가재도구가 없으니 이사는 수월했다.
생활용품을 정리하면 여행용 가방 3개, 자질구레한 짐들로 조수석까지 가득 찼다. 차 트렁크 내에 가득한 낚시용품이 문제이기는 하나 다른 짐은 버려도 낚시 장비는 버리지 못하므로 전자렌지, 전기밥솥 처분은 잘한 일이다.
나주로 가는 길, 3년 전 분당에서 나주 혁신도시로 이사할 때는 가을이었지만 이번에는 더위가 한창이다. 낯설지 않고 익숙한 풍경이라 설레임은 반감되지만 그래도 소풍가는 기분이다. 시원하게 보직 책임을 내려놓은 이유도 있지만 어디 가든 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기러 간다고 생각하니 적당한 긴장과 새로운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는 새로운 임지로 가는 길은 언제나 기분이 상쾌하다. 장성Ic에서 고속도로를 나와 황룡강을 건너니 임곡의 너른 들판은 아직 벼가 어리고, 오렌지빛 능소화는 소담스럽게 피었지만 날이 더운 탓인지 꽃구경하는 사람이 없다. 이런, 주변 경치에 눈이 홀려 길은 잘못 들었다. 임곡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차를 달려 미나리로 유명한 ‘노안’을 지나니 낚시 다녔던 영산강이 보인다. 4대강 수문개방으로 수위는 줄었고 모래톱이 생겼다. 영산강 넘어 지석강의 모습도 예전 그대로 정겹다. 이윽고 나타난 나주 배밭을 보니 벌써부터 홍어 삭힌 내음이 나는 듯하다.
남은 2년간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야 하나 서둘지 않으려 한다. 입수자료는 항상 부서원들과 공유했으니 넘겨줄 자료는 없고, 업무에 필요한 물건이라곤 달랑 만년필 하나 들고 왔다. 후배들에게 남겨 줘야할 암묵지는 무엇이 있을까? 부터 새로운 조직에 가서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후배들을 위해 어떤 일들을 해야 할지 차츰 후배들과 이야기하며 찾으려 한다.
느린 마을 나주에 오니 나주홍어와 서대회 등 입맛 돋우는 음식도 있고 手製 낚시찌를 만들고 맛있는 커피를 로스팅하는 옛 친구들도 있다. 영산강 갈대밭과 숨겨진 경치를 다시는 볼 기회가 없으나 이것도 서두르지 않게 천천히 다니고 맛보려 한다. 이전보다 조금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낚시도 여유롭게 다니려 하니, 바짝 긴장하고 있을 나주 붕어들의 안부는 천천히 물으려 하고, 기억이 흐릿해진 홍어집, 막걸리집 주인아주머니들과 재회의 인사 나누는 것이 먼저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