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과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
남북이산가족상봉 중계방송은 감동적인 드라마였지만 실향민이셨던 부모님의 눈에는 아픔이자 부러움이었을 것이다. 온가족이 마음 졸이며, 상봉이 이루어지면 눈가 촉촉하게 지켜봤다. ‘체형이나 의복도 다르고 삼십여 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비웃듯 이산가족들도 한눈에 친족을 알아봤다. 제3자의 눈에도 얼굴이 비슷해 보이니 유전인자에는 경이로움이 담겨있다.
유전인자는 피지컬뿐 아니라 멘탈에도 계승되기 마련인데 가끔 돌연변이가 생긴다.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 母胎信仰(모태신앙)을 가졌는데도, 게다가 외가는 물론 형제까지도 독실한 신자이며 숟가락 뜨기 전 감사기도 드리는 분위기에서 자랐건만 나는 사상적으로 불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다고 불교를 신앙으로 가질 생각은 없다. 지금도 병상에 계신 어머니의 명이 짧아지게 할 만큼의 불효자는 아니다.
* 어머님은 제가 사상적으로 불교와 가까운 것을 모른 채 2021.11.16일 돌아가셨다. 애통한 일이지만 모르고 소천하신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초등학생 때는 주일이면 교회에 가야한다는 당위성에 따라 예배를 봤다. 이후에는 가정의 화목을 위해 부모님모시고 살 때만 교회에 나간 속칭 무늬만 신자였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불량신도였다. 낚시하러 가느라 결석하는 날은 목사님 만날까봐 교회를 피해 멀리 돌아다녔으니 일말의 양심은 살아있었나 보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는 구원받기 위한 성스러운 장소로 와 닿지 않았다.
잘나가던 사업을 정리한 후 인생항로를 급 변경했던 친구가 개척교회를 세웠을 때는 고교 동창들 모두 내심 놀랬다. 나이 50에 새 출발하는 친구의 용기가 부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서울 방이동 지하실, 허름한 룸살롱 맞은편에 위치한 20평 남짓의 지하교회에는 20명 정도의 신도가 있었다. ‘필승교회’, 초라한 교회지만 성령이 넘쳐흘러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며 친구들은 개업기념으로 냉난방기를 선물했다. 하지만 사업은 입지도 중요한데 주변에 초대형교회가 3개나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목회자로의 변신보다 놀라운 것은 친구의 얼굴이었다. 해병대장교출신 친구의 눈빛은 제대 후에도 매서웠다. 사업이 번창할수록 잦아지는 술자리에 얼굴은 피곤과 짜증으로 쩌들고 흑색으로 변했었는데 어느 날 목회자로 나타난 친구의 얼굴에는 온화와 평화가 깃들어 있었고 눈빛까지 푸근했다. 사업을 접고 신학대학, 해외 선교사, 개척교회 목사로 새 출발하는 과정이 말 못할 정도로 힘들었을 텐데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부처님 뒤에 後光(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친구 얼굴 뒤에도 밝은 아우라(AURA)가 있는듯해 역시 행복은 마음속에 있는 것 같았다.
고교동창들은 종교를 초월해 주말마다 교회로 출근했다. 信心(신심)이 두터워서가 아니라. 신도들의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목회자 친구는 본인의 신앙생활에서 ‘삶의 정답’을 찾은 듯 했다. 무교, 불교, 천주교신자였던 동창들은 ‘삶의 정답’은 본인의 종교에서 찾아야했고 개척 교회에서 찾은 것은 ‘친구의 의리’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의 번창을 기원했다. ‘교회가 속히 자립해 교회로 출근하지 않게 해달라고’
당시 직장에서 신우회 예배를 봤기에 주2회 예배를 봐도 신앙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고민이었으나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친구들은 신장개업(?)한 친구의 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점심을 책임지기로 했으나 주변의 대형교회에 치인 개척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신자가 줄어들어 결국 폐업했다. 신우회 예배는 목사님초빙이 어렵게 되고 주도적인 인물이 빠지며 흐지부지 되었다. 어쨌든 신앙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고민에서는 해방되었다. 세상 모든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과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나뉜다.
‘삶의 정답’ 또는 ‘모범답안’을 찾기 위해 논어, 장자 등 동양고전을 읽다보니 유교, 도교사상의 영향을 받고 바로 옆에 있는 불교와 가깝게 되었다. 철학으로서 불교를 바라보는 것이지 불심과는 전혀 무관하다. 지식이 잡탕이 된 배경에는 물론 내 탓이 크겠지만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를 막론하고 어떤 종교든 토착문화와 대립보다 공존과 공생의 길을 택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적인 탓도 있다.
서양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박해는 있었지만 종교전쟁은 없었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되는 초창기에도 순교자가 여럿 생겼다하고 신유, 병인년 천주교박해 때는 순교자가 많았다. 종교가 정착되는 초창기에는 기존 질서와의 마찰은 불가피하나 정서적으로 동양권의 종교는 동양인에게 거부감이 덜하고 수용정도가 높은 것 같다.
포교하는 과정에서 토착종교와 관습을 아울렀기에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어른 앞에서 담배피우는 것을 금기시하는 한국적 관습을 수용했다. 한국 불교는 토착종교를 수용했다기보다 공존공생을 택한듯하다. 山神閣(산신각)은 대웅전보다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의 국교는 불교였으나 조선이 개국하며 통치이념으로 유교가 등장했다. 자연스럽게 崇儒抑佛(숭유억불)정책이 시행되며 도심에서 밀려난 사찰은 산중으로 찾아들며 터를 잡은 것이 산신각 부근이었단다. 단군 신을 모시는 산신각은 당연히 명당자리에 위치해 있을 테니 사찰은 자연스럽게 명당자리로 찾아들었으며 산신각과 대립하는 대신 공존공생을 택한 것이다.
* 어쩌면, 조선시대 스님들은 비상한 머리를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산신각 위에 대웅전을 지었다면 동네 주민들은 땡중들이 건방지다며 손가락질 했을 것이고 산신각에만 제를 올리고 돌아갔을 텐데, 산신각아래 대웅전을 지었기에 불교의 겸손함을 보여줬고 주민들은 대웅전을 지나쳐야만 산신각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포교할 수 있었다. 명당을 차지하고 신도까지 얻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격 아닌가. 이것은 책에 나오는 定說(정설)이 아니라 혼자 생각하는 野說(야설)이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갖고 태어나 늙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며 죽어야 비로소 괴로움이 끝난다 했으니 생로병사 자체가 번뇌이자 괴로움이라 말한다. 고통과 괴로움은 인간의 쓸데없는 욕망에서 싹이 튼다. 대부분은 많은 돈을 벌고 싶고, 멋진 결혼 상대와 결혼하고 근사한 집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며 내가 노력한 만큼만 보상으로 되돌아오기에 항상 보잘것없어 보이고 괴롭다. 해결방안이 있을까? ‘정답은 없단다.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란다.’
한편으로 정답이 없다는 말에 안도한다. 있지도 않은 ‘삶의 정답’을 찾아 고생하기보다 현실에 충실하고 범사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정답이자 해답인데 조금 더 근사한 답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몹쓸 의심병으로 인해 답을 찾아 헤맨 지 수 세월이다. 적어도 불교에서는 해답이 없으니 고생하지 말란다. 믿어야 한다.
목회자 친구의 얼굴이 환한 것을 보면 성경에도 ‘정답이 없으니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라.’하는 문구가 있을 듯하다.
PS: 개척교회를 호로록 말아먹은 목회자 친구는 교단 본부로 복귀했고 여전히 얼굴이 좋다. 골프전문 월간지인 Golf Digest표지에 등장할 정도의 Golf실력을 갖고 있는 그는 기업인담당 선교목사로 수시로 해외골프를 다닌다. 교단에서 사업경력이 있으며 골프도 잘 치는 목사는 친구가 유일해 기업인 고민 상담을 전담하고 있다. 유일하다보니 기업인들이 친구와 골프를 치며 상담하려면 두둑한 사례금봉투를 들고도 순번을 기다려야 한다. 독점의 弊害(폐해)는 사회곳곳에 있다.
친구의 Case를 봐도 세상 모든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과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나뉜다. 쓰고 보니 ‘정답은 없다.’와 일맥상통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