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당함과 자존감은 어디에서 온 겁니까?’
회사 동료 혼사가 3건이나 겹친 그 날은 매우 바쁜 날이었다. 3곳의 결혼식장에 모두 참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미리 온라인으로 조치했다. 哀事(애사)에는 가급적 참석하나 3건 모두가 慶事(경사)였기에 불참해도 마음은 홀가분하다. 홀로 사시는 어머님 문안인사 후 누나 친구가 췌장암 2기 수술을 받고 입원하고 있어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독수리 10형제 같은 누나 친구들은 어렸을 적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왔고 60중반이 되셨는데도 아직까지 어머님 용돈을 챙겨 주시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누나가 미국 이민 후에는 집사람이 대역으로 누나 친구들 애경사에 참석하기도 하여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병문안 가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집사람과 병문안 가는 길, 분당에 새로 생긴 백화점에서 색색의 과일타르트를 사고 서점에서 책 몇 권을 구입했다, 무슨 위로의 말을 건네야할까? 고민해서 인지 자존감을 높이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내용의 책들만 골라졌다. 일반적으로 췌장암은 늦게 발견되기에 발견 후 6개월을 버티기 어렵다는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병이므로 시한부 삶을 앞둔 사람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 필요할까?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보다 오히려 내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병상의 B누나는 평소보다 더욱 당당해 보였다. 무용담처럼 그림을 그려가며 췌장 위치와 크기, 암을 조기에 발견한 경위를 설명하며 친구들 덕분에 수술도 빠르게 잘 되었고 조만간 퇴원이 가능하다며 암수술이지만 맹장수술과 비슷한 정도라니 걱정하지 말라한다. 아들, 딸도 결혼시켰고 부모님과 남편이 돌아가셔서 거리낄 것도 없다. 운영하고 있는 병원의 직원 월급, 자금집행 등은 수술 전에 이미 조치해 놓았기에 당분간 신경 쓸 일도 없단다.
혹시 췌장암 위험성을 모르고 계신 것은 아닐까? 병원을 운영하고 계시고 이미 인터넷검색으로 나보다 췌장암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계셨는데 긍정과 당당함이 남달라 속으로 놀랐다.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서는 우리부부에게 고맙다고 거수경례를 하시는 모습이 흡사 별을 달고 있는 장군 같다. 수술 후 통증이 있을 텐데도 찡그림 없이, 중한 병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당당한 누나의 태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60대 중반의 인생경륜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명망가의 자녀, 명문학교를 졸업한 커리어 우먼 등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B누나가 퇴원 후 기회가 있다면 당당함의 비결에 대해 인터뷰 해보고 싶다.
살아오면서 돈 앞에 당당하고, 권력 앞에 비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지난했던 길이었던가? 때로는 힘이 들어 혼자 징징거리기도 했으며 나의 길을 포기하고 싶었고 현실과 타협할까하는 유혹으로 고민도 많았다. 집사람 명의의 아파트와 내 명의의 낡은 차 한 대 있으니 사는데 불편이 없고 아이들 모두 대학 졸업했으니 부모 역할을 다 했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위로였는지 모른다. 돈과 권력 앞에서 초라해지고 흔들릴 때마다 내 자신에게 물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현실과 타협하여 업자에게 돈과 향응을 받고, 윗분들에게 바른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치졸한 삶을 산다면 후배들과 아이들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까? 자존감은 무엇이고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위로차 병문안 가서 오히려 당당함을 배우고 내 삶의 치유를 받고 온 이후, 이제는 나에게 물으려 한다. 나는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 ‘군자의 삶’을 동경해 공부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못 다한 공부가 많아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경험도 없지만 서서히 준비해야할 시기가 된듯하다. ‘생을 다할 때 어쩐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까?’
흔히 뜻을 알 수 없는 얄궂은 대화를 보고 선문답한다고 하는데 선문답 안에 진리가 있다. 늘 배움에 대한 갈망이 강했던 도신이라는 어린 승려가 스승 승찬 스님에게 물었다.
‘해탈 할 수 있는 법문을 알려 주십시오.’
‘해탈이라니, 누가 너를 묶었더냐?’
‘아무도 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너는 이미 해탈했다.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 인문학 공부법(안상헌著, 북포스刊) 중에서 -
치명적인 병마와 맞닥뜨린 상태에서 ‘대인배, 긍정대왕’같은 당당함과 마음가짐이 부러웠다. B누나는 절대로 췌장암 따위에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조만간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도신과 승찬의 선문답처럼 될지언정 질문을 하려 한다.
‘도대체 병상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누님이 생각하시는 삶과 죽음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 당당함과 자존감은 어디에서 온 겁니까?’
‘그 비결은 뭐예요? 해탈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