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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 가을의 길목에서

책보는 것이 지루해져 꾀가 생기는가 보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지구온난화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해가 갈수록 더워지고 가을은 짧아지는 것 같다. 울산에서는 열대어류인 맹독성 파란고리문어가 발견되었고 대구의 기온은 하도 높아 ‘대프리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다. 더위가 기승을 떨치는 삼복중에는 강아지 산책을 새벽에 시켜야 한다. 아무리 덥다 해도 강아지가 산책 가자고 하는 성화를 이겨내기 어렵고, 강아지의 원활한 배변활동을 위해서는 하루에 한번 산책을 시켜야 한다. 새벽이지만 분당 중앙공원을 한 바퀴 돌고나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약 7천보

입안이 자주 빛으로 물들게 버찌를 따먹었던 튼실한 벚나무는 잎이 무성하지만 한여름 뜨거운 햇살은 벚나무의 진녹색 이파리를 뚫고 나온다. 푸르름 속에 변색된 이파리 몇 개, 너무 더워 잎이 말랐는지, 눈 부신 햇볕으로 잘못 보았는가 자세히 살펴보니 단풍이 드는 전조가 보인다. 여름이 길어지고 아무리 더위가 사납다 해도 가을이 오는 것을 막지 못하는가 보다. 그렇지, 가을 없이 이렇게 덥기만 하면 사람이 살지 못하지.


공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색다른 나무도 눈에 보인다. 나무들의 여왕이라 불리는 자작나무의 남방한계선은 북한으로 알려져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강원도에나 가야 볼 수 있는데 분당의 공원에서도 하얀 피부를 뽐내며 무더위를 꿋꿋하게 이겨내고 있다. 시베리아나 백두산이 연상되어 보기만 해도 시원한 자작나무가 삼복더위를 용케도 버텨준 것이 대견하다. 감나무와 모과나무는 튼실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고, 상수리도 가지가 휘어지도록 맺혔으며, 어미 등에 업혀 다녔던 새끼 오리들은 벌써 어미오리와 구분 되지 않을 정도로 몸집을 불렸다. 세상만물이 무더위 속에서도 가을을 그려내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자연의 조화인가.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내일모레다. 이미 구름 높이도 변했으며 매미 울음소리는 목이 쉬었는지 한풀 꺾였다. 여름 내내 바쁘게 팔랑거렸던 잠자리도 날아다니는 속도가 줄어들 것이며,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이미 가을은 시작된 것이다. 가을 오는 길목에서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나가 하늘의 조화를 넋 놓고 쳐다보고 있다.


시간의 속도와 나이는 비례한다고 선배님들이 말씀하셨는데 정확한 표현인 듯하다. 버들강아지 솜털을 본지 엊그제 같고 길게만 느껴졌던 여름도 물러갈 채비를 하고 있다. 총알처럼 빠르지 않다 해도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이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것 같다. 출근과 퇴근, 발전소와 회사만 쳐다보고 사느라 집 옆에 이렇게 훌륭한 공원을 두고도 산책을 다닌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너무 바쁘게 살지 않기 위해 책도 뒤적이며 공부하는 것도 어쩌면 잘못된 일인지 모른다. 공부를 핑계로 주변의 나무도 돌아보지 못하고 지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산 것인가?

천문은 하늘이 그린 무늬라 하고 인문은 인간들이 살아가며 그린 무늬라 했는데 분당 중앙공원의 천문도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가듯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나름의 무늬를 만들고 있다. 벚나무, 자작나무는 도심 속 한자리를 꿋꿋하게 버티면서 가을을 그리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그리려고 그리도 바쁘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그려야 할 것인지 조차도 모르면서 앞만 보고 달리면서 허송세월을 보낸 것은 아닌지?


느리게 살려고 노력했건만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고, 나만의 무늬를 그리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 같다. 해 놓은 것도 없는데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아무리 공부해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만 잡으려 헛고생만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회의감도 생긴다. 자연의 위대함속에서 초라함을 느끼는 이런 날은 보던 책도 덮고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여 분당천에 노니는 살찐 잉어들 군무를 보고 있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했는데 책보는 것이 지루해져 꾀가 생기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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