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길을 누구에게 묻는가?(1) (백승영著, 샘터刊)
여는 글: 삶의 소박한 논리가 갖는 힘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잘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고, 행복은 또 어떻게 얻는 것일까요? 삶의 근원적인 질문들이지만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수천 년 인류 역사속의 지혜가 힘을 모아 그 질문들에 응답했고 여전히 응답하고 있지만, 우리는 같은 질문들을 또다시 던집니다. 누구나 ‘지금 여기’에서 ‘각자’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일 겁니다. 그 누구의 삶과도 같지 않고 그 누구의 삶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내 삶이기에, 우리는 물어보는 여정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여정에서 위의 질문들이 ‘나의 행복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내가 잘 사는 것인지’의 양태로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람 수만큼 삶의 양태는 다양합니다. 고유의 관점과 사유방식이라고도 하고 가치관이나 세계관같이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관점과 사유방식을 결정하고 선택합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내가 잘 사는 것인지?’라는 물음에 대해 결국 자신만의 답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옆 사람과 답이 다르고 그래야 정상입니다.
삶의 길도, 그 길을 찾는 과정도, 그 길을 걷는 방식도 다채롭지만, 다음의 제안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의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하자.’ 이 책에서는 이러한 삶의 논리를 적용하여 일상의 작은 지혜 몇 가지를 환기하려 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소박하고 작은 지혜들이 고단한 삶을 조금이라도 덜 고단하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1장 사랑하는 삶이 아름답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재채기나 기침, 숨기려 해도 숨기기 어려운 가난처럼 사랑의 마음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눈빛과 표정만 봐도 드러납니다. 하지만 사랑이 메마른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니 초조하고 불안해 집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 남을 들여다볼 여유도 갖지 못합니다. 사랑으로 넘치는 마음이 있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의 샘은 메말라 갑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풍요로운 사랑의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도 결정적 원인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원인은 내 안의 작은 벌레들입니다. 그 작은 벌레들이 ‘내 것’을 가지라고 말하고, ‘내 것’이 더 많아지기를 원하고 ‘내 것’을 나 자신보다 중히 여기라고 합니다. ‘내 것’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속삭입니다. ‘내 것’은 재물일수도, 명예, 지식, 인기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내 안의 벌레는 그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지식도 소유의 대상, 명예와 인기도 물론이고 재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작은 벌레는 결코 만족을 모릅니다. 계속 배가 고프고 계속 갖고 싶어 합니다. 그 벌레의 욕심 때문에 우리는 갖고 싶어 하지만 왜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그 소유물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관심 없습니다. 그러한 삶에서 ‘내 것’은 나를 살찌우지 않을뿐더러 내 안에 사랑의 샘물도 흐르도록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벌레들의 배만 채워주는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어려워집니다. 자신에 대한 신실한 사랑도, 타인에 대한 품격 있는 사랑도 말이지요. 사랑이 어려워지면 행복해지기도 어렵습니다. 행복이 어려우면 잘 살아가기도 어렵습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선물입니다. ‘그냥 주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주는’사랑은 매우 어렵습니다. 은연중에 되돌아 올 것을 고려하는 습관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되돌아 올 것을 고려하기에 아무에게나 주지 않고, 사랑을 줘도 선물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뇌물로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아끼고 보살피고 애정으로 존중해주면, 옆 사람도 그렇게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남도 진실로 사랑할 줄 아는 법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person이란 단어가 가면persona에서 유래되었듯 우리는 수많은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진짜 욕망과 가짜 욕망을 구분해야 합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욕망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이 보이고 자신의 현재 모습은 대체로 불만스럽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 합니다. 외견상 완벽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지금 모습에 만족하다면 그 모습 그대로 살면 됩니다. 반대로 만족스럽지 않다면 바꾸려 노력하면 됩니다. 매일 아침 내면의 거울을 보며 ‘오늘도 어제의 나처럼 살 것인가?’물어보세요. 어제와 같이 살아도 될 것 같기에 당당하고, 어제와 달리 살려 노력하니 당당합니다. 그런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복에 도달하는 길은 다양합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길이 있습니다만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타당한 것은 사랑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점입니다. 행복은 실체가 없는 마음의 상태로 벅차오르고 즐거워지는 상태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뇌물이 아닌 되돌아오지 않는 선물이지만, 그 선물은 내게 더 큰 선물을 줍니다. 바로 행복입니다.
세네카는 ‘베풂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다시 베푸는 이에게로 돌아간다.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이 세상은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준 사랑은 언젠가는 되돌아오겠지만, 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미 행복으로 보답 받았기에 상관없습니다.
칸트는 ‘사람을 수단으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했습니다. 내가 인격적 존재이고 그런 존재로 대우받고 싶어 하듯, 타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자주 망각됩니다. 내 옆의 친구에게 고약한 말을 하거나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라고 강요하기도 합니다. 마치 그 친구를 목적이 아닌 화풀이 대상, 욕구충족의 도구,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지요. 그 친구는 왜소해지고 괴로움에 지쳐가며 가해자가 되어버린 나는 미안해집니다.
타인에게 좋은 사랑은 결국 내게도 좋습니다. 선물하는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 같지만, 그로인해 나는 행복감을 느끼니 어쩌면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이기성과 이타성을 합일시키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