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을 타나보다.
나주 사옥 옥상 하늘 정원은 벌과 나비가 찾아오기에는 너무 높다. 세상의 벌들이 멸종한다면 식량대란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벌과 나비 없는 하늘 정원에는 올해도 작황이 부진하다. 꽃이 피고 지고 조그만 열매들이 떨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조롱박 9개, 수세미 3개, 여주 6개, 호박 2개가 달렸다. 벌과 나비는 없었지만 바람 불어 자연수정이 되었거나 농사 지어봤던 사우들의 인공수정 덕분으로 흉작이지만 작은 결실을 맺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강렬한 땡볕에도 용케 버티고 있는 조롱박이 고맙다. 상큼한 색상의 줄무늬 수세미가 커가는 것을 보는 것은 아침의 작은 즐거움이고 가녀린 줄기로 버티고 있는 여주와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호박은 자연의 경이다.
8월 햇살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새벽에 올라와 본 하늘정원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르’ 소리, 여름은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한다. 지렁이와 달팽이를 말려 죽이는 강렬한 햇볕을 보이지도 않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이긴 것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것은 자연에서도 통하는가 보다.
내 성격은 상당히 직선적이고 호전적이기까지 하다. 작년, 사업 추진과정에서 암초를 만나 노사 간 이견이 만만치 않았다. 몇 개월간의 조정이 있었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해 긴급 노사협의회가 개최되었다. 노사 대표가 격려사, 환영사를 하면 식전 세리머니가 끝나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사회자가 시나리오에 없던 축사를 내게 추가로 부탁했다.
"노사 대표가 좋은 말씀은 다 하셨으니 특별하게 드릴 말씀은 없다.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아까 조합 대표께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셨는데 당연히 책임질 것은 져야 합니다. 회피할 생각도 없고 감사실에 당장 이야기해서 조사하고 조치토록 하겠습니다." 한순간 회의장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회의가 끝나고 개인 짐을 꾸리니 이삿짐 박스가 다섯 개나 되었다. 이삿짐 박스는 시위하듯 오랫동안 사무실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쇼맨십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이 정치적인 발언을 했다면 정치적으로 보따리를 싼 것이고 진심으로 이야기했다면 진짜로 짐을 꾸린 것이 맞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였을 뿐이다.
나의 장점은 잘 참는 것이지만 가장 큰 단점은 임계점을 지나버리면 너무 직선적이고 도발적이다.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외통수까지 상황을 몰고 가 타협의 여지를 없게 만든다. 그래서 사업부서와 비즈니스에는 맞지 않는지 모른다. 수세미, 조롱박, 여주, 귀뚜라미는 찌고 태울 것 같은 폭염을 부드럽게 이겨냈으나 강함에 강함으로 대하는 나는 표면적으로 이겼을지 몰라도 내면으로는 이기지 못했다.
노자는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인지생야유약 기사야견강)이라 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을 때는 곧고 강해진다는 말인데 사람뿐 아니라 풀과 나무도 어릴 때는 부드럽고 수명이 다할 때는 곧고 강해진다. 강하고 센 것은 죽음에 가까운 것이고 부드럽고 유한 것은 삶에 가까운 것이다. 이래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가 보다. 요즘 아재와 아줌마들은 고집 세고 얼굴 두꺼우며 논쟁이 시작되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 죽을 때가 가까워졌다고 이해하면 맞을 것 같다.
柔能制剛(유능제강), 하늘정원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니 작년 조합과 있었던 트러블이 생각났다. 조롱박과 수세미와 여주의 부드러움이 폭염을 이겼는데 책임지라는 한마디에 무너진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을 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