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 없는 게임으로 이끌어야 하니 고민이 많다.
명분은 진보주의자가 중시하고 실리는 보수주의자가 중시한다고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고려, 조선은 보수적이었으나 실리보다 명분을 중요시해서 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와 조선은 명분을 놓치면 비난에 휩싸이고 정당성을 잃게 되어 정쟁이 일어나니 명분을 중시한 것도 있지만 파벌싸움이 치열했던 것도 또 다른 원인이었다. 머리 아프게 할 의도는 없으나 고등학생 시절 배웠던 역사를 보면 성종 때 성리학을 전공했던 사림파, 단종 폐위로 공을 세운 훈구파와 왕의 인척들인 척신파가 있었다. 이후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고, 동인에서 나눠진 북인과 남인, 이후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게 되며, 인조반정으로 세력을 잡은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각자가 추구하는 명분이 달랐다. 주도권을 장악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과 논리개발로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것도 패망 원인이 아닌가 한다. 실리를 놓치면 국가가 약해지는데 실제로 조선 후기 실학파는 득세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실리만 따질 수 없는 것이고 명분과 실리 모두 중요하며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명분의 중요성
명분은 당파싸움용이 아니라 현시대에도 중요하다. 손자병법에서는 이기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5가지 틀을 道, 天, 地, 將, 法을 들고 있으며 하나라도 부족하면 필승이 어렵다 했다. 첫 번째인 도가 명분이다. 명분이 명확치 않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데 아무리 용감한 장수라도 명분이 약하면 장병들의 마음을 한 군데로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의 마음을 뭉치게 하는 것이 명분이다. 올바르지 못한 목표를 수립하면 명분이 약해져 결집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므로 궁극적으로는 명분이 결과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실리의 중요성
조선의 임금 중 ‘조’, ‘종’이 아닌 ‘군’이라 칭하는 임금은 2명이다. 왕위에서 쫓겨난 왕이란 뜻의 ‘군’은 연산군, 광해군으로 둘 중 광해군은 적자가 없었던 선조가 후궁에게서 얻은 13명의 아들 중 가장 총명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피난가서 민심이 멀어져 갔으나 광해군은 의병을 격려하고 백성을 달랬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며 피폐해진 민심을 복구했다. 지방 특산물을 바치던 것을 쌀로 대체하게 하는 대동법 시행으로 민심을 얻었고, 1618년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때 명의 파병 요청을 미루고 미루다 명나라로 파병 후 장군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게 되는데 명나라로 파병하고 후금과의 전쟁을 예방하는 광해군의 실리외교였다.
이후 명분을 중요시하는 신하들에 의해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났고 이후 인조는 후금(이후 청나라)에 강경노선을 택해 결국 병자호란 때 송파 삼전도에서 바닥에 머리를 세 번 찧는 치욕의 역사를 남겼다.
협상의 결과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을 수 있는 협상이나 전쟁은 일방의 힘이 상대방을 압도할 때 가능하다. 미국이 리비아 가다피를 제거할 때도 세계평화, 독재 척결, 화학무기 제거 등 여러 가지 명분이 있었고 결국 가다피는 제거되었다. 이후 화학무기의 존재가 없다는 보고도 있었으니 미국은 리비아 침공 명분으로 이용했는지 모른다. 이것은 초강국이기에 가능했다. 리비아가 화학무기를 생산하거나 이용하지 않았더라도 미국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야 하는 것이 국제질서다.
상대와 대등하거나 압도할 만큼의 힘이 없다면 서로 간에 명분과 실리가 필요하나, 명분을 얻지 못해도 실리를 많이 얻는 것이 내부적으로는 훌륭한 명분이 될 수 있다. 여의도에서 여, 야 협상과정을 보면 명분과 실리를 놓고 하는 샅바싸움이다. 셀프디스를 하지 않는 한 일방이 명분과 실리 모두를 취할 수 없다. 요즈음 선거구 획정 문제로 여, 야가 시끄럽다. 아무리 막 나가는 여의도라 하지만 국민들의 눈이 있으니 명분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
‘인구수는 적어도 농어촌 민의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농어촌 지역구를 감소시킬 수 없으니 비례대표 의원수를 줄여야 한다.’ ‘농어촌지역 민의를 대표하는 비례대표를 선출하면 된다.’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또한 명분 있는 싸움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의도에서 이야기하는 명분을 잘 들여다보면 결국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가 아니므로 명분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실리와 일맥상통한다.
최근 한전과의 협의에서도 같은 논리로 접근하려 고민을 많이 했다.(한전과는 모회사, 자회사의 관계이며 힘으로 봤을 때 한전이 강대국이다.) 우리 회사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한전은 명분을, 우리는 실리를 취해야 하는 게임인데 우리 회사는 직원들 일자리와 관련되어 있으니 조합 의견도 고려해야 한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노측이 공식적인 이의제기를 했으니 노측과 사측도 정치공학적 명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한전과 우리 회사의 양자관계가 아닌, 조합 측과 사측 등 다자관계가 되니 이차함수를 넘어 미적분과 같이 복잡하게 되었다. 엉킨 실타래가 복잡할수록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하지 못할 경우의 협상에서
명분을 중시해야 하나?
실리를 중시해야 하나?
명분을 이길만한 실리는 무엇인가?
명분 있는 실리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이 게임을 한전, 우리 회사, 노동조합과 사측도 이겨야 하는, 패자 없는 게임으로 이끌어야 하니 고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