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1)

당신이 있어 고맙습니다(1). (이철수著, 삼인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한 생애가 담긴 글

이 사람아! 옛사람들이 적어 남긴 고전이야 어찌 마주 앉아 듣는 말씀처럼 분명할 수 있는가?

이런 뜻일지 저런 뜻이었을지 짐작해 보고 상상해 보면서 가까워지는 것이지. 헤매는 재미가 으뜸 아닌가?

마음에 담아두고 살다 보면, 내 인생이 낡아가면서 오히려 새롭게 읽히고 더 깊이 알겠다 싶은 대목이 생겨나기도 하던걸.

고전은 한 생애를 두고 읽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겠네. 한 생애가 담긴 글이라면 마땅히 한 생애로 읽어야지.

그렇지 않은가? 그대와 내가 이렇게 마주 앉은 것처럼 말일세.


아침밥으로 소주를

겨우 길을 덮었지만, 아침 해가 떠서 눈을 다 녹이기까지는 겨울 설경이 고왔습니다.

새벽 숫눈을 밟고 간 건 아이들 이른 등교였을 테지만, 아직 인적이 드문 아침 길로 타박타박 걷는 이는 술 마시는 강 씨 였습니다.

새벽잠에서 깨어 밥 시장기가 오기 전에 술 허기가 먼저 온 모양입니다.

두부인심이 좋은 구판장이 일찍 문 열었으면 술국대신 순두부 한 그릇에 해장할 수 있을 테지만, 운이 나쁘면 아침부터 찬 소주로 헛헛한 속을 달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디서나 밥보다 술에 먼저 손이 가는 이들이 마을에 두엇 더 있습니다.

한결같이 여리고 순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술기운이 더 따듯하고 살가웠던가 봅니다.


새날

새벽에 눈뜨면 새날입니다.

햇살이 눈부시지요! 밝습니다.

살아서 맞는 모든 아침이 새날입니다.

그 어느 아침도, 전에 있었을 리 없는 옹근 새날입니다.

그렇듯, 존재도 그렇게 새로워져야 합니다.

방금 갓 태어난 어린 생명에게 새날인 것처럼,

늙고 병든 존재에게 주어진 아침도 어쩔 도리 없습니다. 새날입니다.

경이로운 새날을 맞은 기쁨으로 마음 설레고,

몸은 새날을 살아갈 기운으로 넘쳐나시기 빕니다.

성취와 보람은 물론, 실패와 좌절, 실망조차 새날의 경이로움 위에

그렇게,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사랑으로

가난하던 시절.

호주머니가 가벼워진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선물대신 오방떡 한 봉지를 샀습니다.

식은 오방떡을 프라이팬에 데워 주시면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올해는 형편이 어려워서 이것 박에 준비하지 못했다고

오방떡 몇 개가 전부였던 그 저녁은,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기억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잘 압니다. 부모의 가난도 잘 알고 부모의 마음도 잘 압니다.

아이들을 바르게 키워가는 건 사랑입니다.

때로 경제적 여유가 아이를 망치듯 가난은 아이를 망치지만,

사랑 결핍이 가장 큰 이유지요.

아이들은 말없는 사랑조차 온몸으로 느껴 압니다.

아이들 믿으셔도 됩니다. 문제는 늘 어른이지요.

가난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세상에서, 어른 노릇 제대로 하려면 마음에 따듯한 것 넉넉하게 준비해야 하지 싶습니다. 힘내시자고!


외롭지 않으면

초라하고 힘겹지만, 일 속에서 존재와 삶에 대한 성찰 있을 수 있어서 노동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일하지 않으면서 넉넉한 살림살이 부러워하지 마세요.

우리 다 같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쉽게 살아가려다, 없는 가치를 부풀린 탓에, 겪게 된, 금융위기가 온 세계를 고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주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사는 게, 없으면 안 쓰고 사는 게, 옹색스러울지 모르지만 이럴 땐 그것도 괜찮던데요? 좋은 사람들 곁에서 외롭지 않으면 다 얻은 것 아닌가요?


어머니로 사는 당신께

살면서 두고두고 힘이 되는 기억 있으시지요?

가난하던 시절, 뻔한 가난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시던 어머니가 기억납니다.

힘겨운 삶이 자식들의 일상에 깊은 그늘과 상처가 되지 않게 하려고

애쓰시던 어머니에게서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물론, 그 가난이 어디로 가지는 않았지만 견디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풍경

눈 가고 바람이 왔다.

늘 그렇듯 풍경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풍경은 옛일 기억하지 않는다.

늘 이 순간을 살지. 거친 바람 마다하지 않고!


오래 계시지는 말라고

슬픔이 많아지셨거든,

아픔이 많아지셨거든,

그게 마음에 너무 큰 자리 차지해 있거든,

일일이 불러와 앉히고 이야기 나누세요.

인사하는 거지요.

오셨느냐고! 오래 계시지는 말라고!

그러기에 적당한 자리는 아니라고!

조용히 계시다가, 떠날 때 다시 인사하자고 해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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