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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내 자신이 바뀌고 변해야 한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논어는 600여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문장이 귀하지만 첫 문장을 최고로 치는 사람들이 많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그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오면 기쁘지 아니한가,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해 매우 친숙한 논어의 첫 문장이 최고의 문장이란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퇴직 후의 삶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바닷가 보이는 언덕 위 작은집에서 졸리도록 책을 읽고, 늦은 오후 벗이 막걸리 한 병 들고 찾아와 김치전에 술 한 잔 한다면 세상이 나를 알아주던 말든 행복한 삶이 아닌가?’ 논어의 첫 문장은 버킷리스트에 올라와 있어 ‘한 달 살아보기’라도 하려한다. 찾아오겠다는 친구는 있는데 아직 집을 구하지 못했다.


은퇴하기 전까지 마음에 새겼던 문장은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자왈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였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업무를 알고 회사를 좋아하는 경지를 넘어 회사를 놀이터로, 업무를 놀이처럼 여긴다면 일하는 것이 즐거우니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출근이 기다려질 것이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적지 않은 기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문장이었다. 물론 구성원 모두가 不如樂之者의 자세를 갖는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캐치프레이즈도 만들고 가는 곳마다 후배들에게 강요하듯 이야기했다. 사무실 벽에‘출근이 기다려지는 oo팀’이라고 크게 써 붙여 놓아라.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출근하고 싶어, 팀장님도 보고 싶고 주임님도 보고 싶고 빨리 출근하고 싶어.’ 주문 외우듯이 하다보면 洗腦(세뇌) 되어 뇌가 착각하게 된다. 우리 뇌는 생각보다 똑똑하지 못하다. 시간이 흐른 뒤 몇몇 직원들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농담하신다고 생각했으나 여러 번 말씀하시기에 장난삼아 해봤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제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출근버스 놓칠까봐 뛰어가는 날이 많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출근준비를 마치고 버스도착시간을 기다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정말 출근이 기다려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 먹고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인데 여유 있게 버스를 기다리며 출근하고픈 직장을 갖게 된 후배는 이미 성공을 맛본 것이다. 대학 전공을 선택하는 것도 자의가 아닌 부모님이나 선생님 등 타의에 의해 결정되곤 하며, 스펙을 쌓아도 원하는 회사에서 희망하는 보직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직업이 만개가 넘지만 취업희망자 모두가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맡겨진 상황과 업무를 좋아하도록 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도 빠르게 성공하는 방법이다.

시대에 따라 직업은 생성, 소멸되고 세대가 거듭될수록 직업에 대한 인식은 급속하게 바뀐다. 士農工商의 시대를 지나 1960년대 최고직업은 안정되고 귀한 물자를 얻을 수 있는 미국대사관 직원이었단다. 1970년대는 종합상사직원, 80년대는 엔지니어와 금융인의 시대였으며, 최근에는 안정적인 공무원과 공기업직원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또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이야기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엄연히 귀천이 존재한다. 그래서 대다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의사나 판사가 되었으면 하지 뙤약볕 아래에서 돌을 쪼아야 하는 석공, 음식배달 하는 라이더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과 사고는 그리 오래 지속될 것 같지는 않다. 00년대 생의 직업선택 조건은 귀천보다는좋아하는 일이냐, 아니냐가 될 것이며, 자기 계발가능성과 자율성 존중여부가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입사해서 원자력발전소에 배치되고, 품질보증업무를 하게 된 과정을 보면 의지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손으로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를 짓던 시절이라 입사동기들 대부분이 원자력발전소에 배치되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오리엔테이션기간 같은 방을 쓰게 된 친구가 본인 고향인 부산으로 같이 가자해서 연고도 없는 곳으로 갔고, 동기생끼리 가위 바위 보에서 졌기에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전기부로 가지 못하고 품질보증부로 배치되었다. 학교에서 원자력과 품질보증에 대해 가르치지 않던 시기라 모든 것이 생소했다.

세 달여의 교육이 끝난 후 맡겨진 일이 발전설비별 예방점검표를 개발하는 것으로 자료실에 산더미처럼 쌓인 O&M Manual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공부하기 싫어 입사했는데 공부의 연속이라 지겨울 때마다 자기최면을 걸었다.‘이건 공부가 아니고 소설 읽는 거야. 읽기만 해도 월급을 주니 얼마나 좋아. 오늘 10권만 읽자.’끝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읽고 정리하는데 6개월이 소요되었다. 세상사 잘되면 내 덕이고 안 되면 네 탓이므로 내 자신이 대견했고 업무를 지시한 부장님을 6개월간 원망했었다.

예방점검표를 만드는 것이 주어진 업무였지만 O&M Manual을 모두 읽고 보니 여러 업무가 눈에 보였다. O&M Manual을 구분 정리하는 체계가 없어 직원들이 특정 설비의 O&M Manual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모든 자료를 읽어봤으므로 어떻게 관리해야할지 개념이 잡혔다. 기계, 전기, 계측으로 분류하고 설비이름 즉, Pump P, Valve V로 이니셜을 부여하는 정리체계를 만들었다. 국제공용인 십진분류법을 몰랐으니 단순무식한 분류방법이었지만 매우 편리했다.

O&M Manual중 예방점검과 관련된 부분을 종합해보니 제작사가 달라도 점검기준이 같은 것이 많아 설비별 점검기준을 모아 기술 자료를 만들었다. 깐깐한 부장님이 입사 1년도 안된 신입직원이 시킨 일 이외의 업무결과물을 갖고 오니 대견했던 모양이다.‘잘 했어, 정리 잘 했네, 현장부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배부하고 다른 쓸 만한 내용이 있다면 2편도 만들어봐. 그리고 저녁에 돼지갈비 먹으러 가자.’


짜증내며 O&M Manual을 공부했다면 내지 못했을 성과이나, 공부가 아니라고 내 자신을 속여 가며 업무를 수행했기에 조그마한 성과라도 도출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부장님은 매우 훌륭한 분이셨고, 자료실에 가득했던 기계, 전기, 계측 등 모든 자료를 공부한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이는 퇴직할 때까지 업무를 수행하는 기본지식이 되었으며 내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이 들어서야 깨달았다.‘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내 자신이 바뀌고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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