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1)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1) (양재숙著, 가람기획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이순신장군이 영국의 넬슨제독과 견줄만하고 19세기 일본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전술전략’을 가르쳤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해군이 이순신장군의 영령에게 승전을 기원했을 정도인데 우리만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은 왜 발생되었나? 일본은 명나라의 冊封國(책봉국)이 되는 것을 원했으나 명나라가 거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책봉국이란 일본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었으나 명나라는 받은 조공보다 많은 물자를 답례로 줘야 했으며 일본은 선진문물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므로 일본 이익이 더욱 많았다. 일본은 명나라로의 진군을 위해 조선에 길을 터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했고 당파싸움에 빠진 조정은 일본이 침공하지 않을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1592년 4월 13일 저녁 5시 부산 앞바다는 일본군 전선들로 가득했다. 드디어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기세에 놀라 전선 73척과 화포, 군기를 수장시킨 후 도망갔으며 14일부터 시작된 지상전에서 조총에 놀란 조선군인 들은 혼비백산 했다. 부산진성의 3000여 조선군은 몰살되었으며 4월 15일 아침 동래성이 함락되었으나 조정에서는 17일에야 일본의 침공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지 않았던 조선군은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일본군 158,700명은 1,2,3군으로 나눠 4월 25일 상주, 4월 28일 충주, 5월 3일 서울을 접수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1100리 이니 일본군은 하루 60리씩 진격을 했다. 5월 17일 임진강, 6월 15일 평양을 접수했다.


원균이 부산에서 해전을 포기했고 일본군이 육전에서 쾌속 진군을 했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도 수군은 달랐다. 전라도 수군은 침공에 대비했으며 일본군 전함은 빨랐으나 약했고, 조선군 전함은 느렸으나 튼튼했다.

1차 출동을 한 5월 4일부터 9일까지 옥포, 합포, 직진포 해전에서 42척을 격파하고 6000여 명의 수군을 수장시켰다. 조선 수군은 1명의 부상자만 있었을 뿐이다.

2차 출동을 한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진해, 장항포, 율포 전투에서는 72척의 적선을 격파하고 10000명의 적군을 수장시켰다. 아군의 피해는 전함 손실이 없었고 전사 11명 부상 47명이 있었다. 3차 출동은 7월 6일부터 13일까지 한산도, 안골포 해전에서 적선 79척을 격파하고 적군 13,000명을 수장시켰다, 조선은 전함 손실이 없었고 사상자는 138명이었다.

일본군은 해전에서 패함으로 인해 해상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육지에서의 평양까지의 진격 후 주춤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 시기에 전라, 충청, 황해, 평안도에서 군량을 비축시키고 반격을 도모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이순신장군은 4차 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주력 해군은 부산을 근거지로 하고 있어 9월 1일 부산으로 출진하여 130척과 3000여 명의 적군을 수장시켰고 아군의 사상자는 31명이었다, 해가 바뀐 2월 10일 5차 출동이 있었다. 웅포는 왜군이 도주하기 위한 곳으로 일본군 측면에서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하지만 포구 입구에 방책을 설치해 수비에만 치중하는 일본군을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적선 20여 척만 부쉈고 조선군 전함도 2척이 손실을 입었다.


조선의 제해권 장악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보급로를 차단해 이미 상륙한 일본의 육군 158천 명이 이미 장악한 곳에서 더 이상 진격을 못하게 하는 효과, 일본 증원군 10만 명을 합류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평양까지 진격 후 더 이상 북진을 하지 못한 이유는 의병의 반격도 있었지만 주요 병력이 읍성과 보급로 경비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대량의 군수품들이 낙동강, 금강, 한강, 대동강을 타고 운송되어야 하나 이것이 원활치 못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 조총에 놀라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던 조선군들과 의병들은 수성에 치중하는 일본군에 대해 치고 빠지기식의 유격전을 벌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빼앗긴 성들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 수군들은 일본의 상륙기지인 부산까지 공격하기 시작하자 일본군 전력이 약화되고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곽재우가 현풍성, 창녕성, 영산성 등 경상우도를 장악했고, 권응수는 영천, 의성, 안동 등 경상좌도를 수복했다. 해상장악과 의병들의 승리로 인해 개전 3개월 후 일본군은 3개의 육상보급로 중 2개를 잃어 중앙보급로 하나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겨울이 찾아왔다. 서울은 1월 평균기온이 영하 4.9도이나 개마고원의 갑산지역은 최저 영하 42도나 된다. 따뜻한 남쪽에서 살던 일본군이 견디기 힘든 기온이며 보급로가 끊겼고 노략질과 방화로 인해 민가를 털어도 겨울옷을 구하기 어려웠다.

명나라는 왜군의 북진을 막기 위하여 조선출정을 결정했다. 11월 26일 왜군과의 회담에서 물러가라 했으나 왜군은 이를 거부했다. 12월 6일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공격을 개시하였고 9일 평양성을 탈환했다. 패주 하는 왜군은 18일 서울에 도착했고 조명연합군은 19일 개성까지 남진하였다. 함경도를 점령한 왜군 이외에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의 왜군은 서울로 집결했다. 평양성전투에서 이긴 조명연합군은 왜군을 얕봐 서울로 바로 진격했으나 벽제에서 패전을 하고 파주로 도망쳤다.


1593년 2월 행주대첩에서 2300명의 조선군을 왜군 3만 명이 공격했으나 실패한 후 2월 29일 함경도 왜군까지 서울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철수과정에서 혹한으로 많은 군인이 동사했다. 1593년 3월 20일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의 병력은 53000명이었다. 손실률이 44.7%였다.(일본자료를 보면 총병력 201,470명이 침공하여 75,613명이 사망했다)

2월 27일 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철수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왜군은 부산까지 안전한 후퇴를 위해 조명연합군과 협상했다. 사로잡힌 두 명의 왕자와 일본군장수 1명을 넘겨주는 조건이었다. 4월 8일 협상은 타결되었으며 18일 철군이 시작되었다. 개전 스무날 만인 1592년 05월 03일 서울이 점령된 후 11개월 보름 만에 권율에 의해 서울이 무혈 수복되었다.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려는 조선군을 명군이 막았다. 명나라는 중국으로 일본군이 진출하려는 상황을 저지했기에 더 이상 확전을 원치 않았다. 왜군이 철수하기 시작해 보름이 지난 5월 2일 명나라는 왜군의 추격을 허락했으나 왜군은 이미 경상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퇴각하는 왜군은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부산, 경남지방을 수성하는 상태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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