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2) (양재숙著, 가람기획刊)
1편에 이어 그러면 왜 임진왜란은 7년간 전쟁이 지속되었을까?
일본은 개전 1년 사이에 7만 명의 손실을 입었고 부산에서 평양까지 1700리에 달하는 보급로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군사를 징병하는 것도 어려웠다. 명나라군도 일부가 철수하고 12월 18일 현재 왜군도 43000명을 남기고 일부는 철수했으나 산발적인 국지전은 계속되었다.
한편, 전쟁을 끝내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도 지속되었다. 1593년 겨울, 조선의 반대 속에 명과 일본은 강화회담이 지속되고 있었다. 평화도 전쟁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다. 1954년 3월 4일 이순신은 7차 출동을 했다. 당항포해전에서 31척의 적선을 불태웠고 아군 전함의 피해는 없었다. 8월 2일 명나라 국내정세의 혼미로 인해 명군은 완전 철군을 했고 9월 일본군도 5천이 철수하여 잔류 병력은 38,000명이 되었다.
밀고 당기는 외교적 노력 끝에 명나라는 일본이 책봉국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전의 강화협상에서 주장하던 명나라 황녀를 일본에 출가시키고 조선을 분할통치하고 조선의 인질을 일본에 보내야 한다는 일본의 주장도 받아들여진 것으로 생각을 했다.
1595년 4월 28일 명나라 책봉사가 서울에 도착했고 5월 26일 일본군이 철군을 시작했다. 해가 바뀐 1596년 일본으로 들어간 심유경과 유키나가에게서 연락이 없자 일본군 진영에 머물던 책봉사 이종성이 불안을 느껴 4월 3일 탈출해서 명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심유경이 돌아오자 일이 이 모양이 나버려 양방형을 책봉사로 하여 일본으로 향했다. 8월 4일 조선도 명나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309명의 통신사를 파견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면접을 거부했다. 명나라에는 일본이 명나라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하고, 일본에는 명나라가 강화조약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계략을 세운 심유경과 유키나가의 속임수를 모르는 책봉사들은 영문을 몰라했다.
다음날 책봉사를 접견하는 자리, 도요토미는 자신이 주장한 조선분할 등의 조건을 명나라가 인정하는 것으로 알았고, 책봉사들은 명 황제에게서 일본 왕으로 책봉을 받는 행사로 알았다. 도요토미가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심유경은 무릎의 종기 때문이라고 둘러댔고, 도요토미는 조선의 반이 들어오는 순간으로 착각하여 사신들에게 커다란 잔치를 벌여 대접했다. 잔치 끝에 도요토미가 글을 아는 스님 승태를 불러 명나라의 서신을 읽어보라 했다. 심유경이 승태스님에게 적당히 읽으라고 미리 손을 써 놓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승태는 곧이곧대로 읽었다. 대로한 도요토미가 길길이 날뛰었고 사신들을 모두 죽이라 했으나 옆에서 말리는 바람에 죽이지는 않았다. 사신들이 퇴거하자 도요토미는 재침공을 지시했다.
1597 정유년, 전쟁이 6년 차로 접어들었다. 정유재란의 첫해이다. 당시 조선에 잔류한 왜군은 20,300명 재 침공한 왜군이 121,100명이었다. 일본의 12만 대군이 서생에 상륙하고 13일째인 1월 27일 이순신은 명령을 불복한 죄로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된다. 당파싸움의 비극이었다. 모진고문을 당했으나 목숨은 건지고 4월 1일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3번째 파직이고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선조는 명에 원군을 요청하고 11월까지 8만 명의 원군을 파병했다.
이순신대신 원균이 통제사가 된 후 조선수군 군율은 무너졌다. 7월 5일 134척의 군함을 출동시켜 부산으로 향했으나 일본수군에게 전멸당하다시피 했다. 경상우수사 배설 휘하 12척의 전함이 겨우 빠져나와 통제사로 갔다. 조선수군을 전멸시킨 일본군은 7월 하순 전라도로 총진격을 했다. 7월 28일 5만의 왜군이 부산포를 출발하여 서쪽을 향해 광양까지 진격했으나 조선 수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남원성과 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조선인의 코를 배었다. 한편 공주를 거쳐 북진을 계속한 왜군들은 천안까지 올라와 있었다. 히데요시의 2차전쟁의 목표는 조선을 점령한 뒤 한강 이남 지배를 현실화하는 것이었다. 9월 9일 세자인 광해군과 왕비 일행이 피난길에 나섰다.
9월 하순이 되자 3도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전함 12척을 이끌고 명량해협에서 적선 200여 척을 궤멸시키는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두었고 일본은 다시 서해진출이 봉쇄되어 고립무원 상태에 빠졌다. 왜군은 다시 부산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조명연합군 반격이 시작되어 12월 22일 울산성으로 진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했고 해를 넘기게 되었다. 조명연합군은 1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양측은 다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1598년, 한편 이순신은 전함을 85척, 수군은 16000명으로 증강했다. 7월 16일 명나라도 130척의 해군을 참전시켰지만 뒷전에서 전리품을 챙기는 수준이었다. 7월 18일 100여 척의 왜군이 고흥에 침범했으나 11척의 적선만을 발견하고 나포하였다.
8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했다.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진출을 위해 조선을 침략해 조명 연합군과 7년 전쟁을 벌인 그가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히데요시의 죽음과 조선에서 철군이 극비에 결정되었으나 첩보를 접한 조명 연합군이 최후의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9월 17일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1월로 접어들자 쓰시마로 일본의 철수가 본격화되었다, 11월 16일 사천성에서도 퇴각하고 18일 울산성에서도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장수에게 뇌물을 주고 안전한 퇴로를 확보했는데 이순신은 이를 거절했다. 명나라장수 진린은 왜군의 안전한 퇴각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이순신은 노량에서 마지막 해전을 했다. 왜군의 전선 200여 척이 격파되었고 이순신 등 조선의 장수 10명도 사망했다. 적탄이 이순신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왔다고 기록되었다. 조선의 갑옷은 우수했고 방패로 보호를 했는데 의문이다. 이순신이 갑옷을 벗고 적탄에 맞았다는 기록도 있고 전사를 가장하여 자결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전쟁이 끝난 2년 후 1600년 10월 일본은 정권이 바뀌었고 전쟁으로 기진맥진했던 명나라는 1644년 청나라에 의해 망했다.
(후기)
1598년 전쟁의 마지막 해까지 7년간 총 105회의 전투가 벌어져 조선이 65회를 이겼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일본을 국가로 보지 않기에 조선 역사책에는 전쟁이 아닌 왜구의 난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은 승전과 패전으로 기록되지만 난리는 평정만이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이긴 전쟁이었으나 전쟁으로 기록되지 않고 왜구의 난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조의 파정과 이순신장군의 승리 정도로만 기억되는 임진왜란은 한국인에게는 패한 전쟁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일본이 이긴 전쟁이었다면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일본은 이기지 못한 것이 맞았다. 일본 왜병들이 물러갔으니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 단순한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학교에서는 왜 이것을 가르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