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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버킷 리스트

지금부터라도 노트에 하나하나씩 적어가려 합니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존 웨인이나 게리 쿠퍼 등이 등장하는 서부영화를 보면 사형수의 목을 매달기 전 소원을 물어봅니다. ‘나이 80이 되면 매달아 주세요.’라는 소원은 빼고 형을 집행하기 전 담배 한 모금 등의 간단한 마지막 소원을 들어줍니다. 담배 한 모금을 맛있게 들이켠 사형수가 Bucket 즉 물통이나 술을 담갔던 오크통 위에 올라가 밧줄을 목에 걸면 사형집행인이 버킷을 발로 차서 간단하게 사형절차를 끝냅니다. 이때부터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생긴 것 같은데 요즈음은 죽기 전 하고픈 일 또는 해야 하는 일 등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남자의 자격’이라는 예능프로그램은 죽기 전 해야 할 101가지 버킷리스트를 시청자들을 대신해서 구현해 나가는 프로그램입니다. 합창도 해보고, 농사도 지어보고 일반인들이 동경했던 사항들을 연예인들이 대신하여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는 프로그램입니다. 또한, 시중에는 ‘30대의 버킷리스트’ ‘죽기 전 가봐야 할 여행지 100선’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 등 거창한 버킷리스트가 남용, 남발되고 있지만 만약 우리가 죽을병에 걸려 투병을 하고 있다면 아침에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눈이 부시도록 따가운 햇살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내일 하는 중환자들에게는 내일이 없으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쳐도 내일이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아름답고 살만할 것 같습니다.


안전재난팀에 근무하면서 3년 동안 매주 써왔던 안전편지를 차장이 책으로 묶어서 단행본 샘플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퇴직하기 전 제목에 우리 회사 이름이 들어간 책을 내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는데 제가 안전팀을 떠난 기념으로 샘플을 묶어줬습니다. 제 버킷리스트를 해결해 주려했던 후배님에게 감사를 드렸지만 책자발간은 사양했습니다. 우리 회사 이름이 들어갔지만 사내에서만 통용되는 책이 아니라 서점에 놓고 팔아야 ‘한전KPS’라고 검색이 될 터이니 제 버킷리스트와는 조금 방향이 다르기도 하고 아직 단행본을 묶을 만한 글 실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登壇作家(등단작가)도 아니니 책 내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지요. 회사이름을 표지에 넣으려면 등단해야 회사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고 회사이름을 넣으려면 퇴직하기 전이라야 유리할 듯합니다. 제가 오늘도 글쓰기 연습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버킷리스트의 한 가지 항목을 지우기 위함입니다.


제가 가끔 회사 내에서 뚜쟁이 역할을 합니다. ‘잘생긴 사람들 번개팅’ ‘좋은 사람들 번개팅’등 몇 개의 모임을 주선합니다. 물론 제가 주선하니 잘생긴 사람도 되고 좋은 사람도 되는 이점이 있습니다. 잘 생기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번개팅에 참석을 하는데 모이신 분들 대부분이 막걸리 한잔하신 후에는 좋은 회사를 만들어서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술직과 사무직, 처장과 차장들 계층 구분 없이 같은 생각을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회사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조직의 이익을 대변하느라 서로 담쌓는 발언을 해서 소원해졌던 관계가 막걸리 한잔에 눈 녹듯 풀어지니 신기한 일입니다. 가끔씩은 막발폭탄주 (막걸리와 가끔 찬조로 들어오는 발렌타인으로 제조한 폭탄주) 한잔으로 ‘좋은 회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자.’는 참석자들의 공통적인 버킷리스트를 만들었으니 대단하고 신기한 막걸리입니다.

어쨌든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부서, 직급 관계없이 하고픈 말들을 해볼 수 있는 場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공식적인 장은 ‘한전KPS 미래FORUM’이고 비공식적 장은 ‘막걸리 번개팅’입니다. 때로는 감사실에서도 참석하니 사조직이라는 비난받지 않아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갖고 있는 버킷리스트는 회사업무이지 진정한 제 인생의 버킷리스트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남미인은 왜 행복할까?’ 의문을 풀기 위한 언젠가는 남미로 해외여행을 가보려 합니다. 역마살이 있으니 가서 눌러살지 모르겠으나 지구 반대편에 가서 그네들 삶을 보고 왜 행복한지 호기심을 풀어보겠습니다.

두 번째 버킷리스트는 퇴직 후 시골에서 사는 것이지만 굉장한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집사람과 아이들이 반대하니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 구체적 방안이 없습니다. 가족들은 아빠가 시골 가서 살면 주기적으로 유기농 채소를 보내주고, 여름에는 놀러 갈 테니 방청소나 잘하며 살라고 해서 아직까지 해결방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제 버킷이 너무 작은 느낌이 들지요? 아직 구체화시키지 못한 퇴직 후 버킷리스트가 있기는 하지만 새벽같이 출근하여 밤늦도록 기계와 서류와 씨름하며 살아왔기에 준비할 짬이 부족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노트에 하나하나씩 적어가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씩 이루어 나가고 있는지는 10년 후에 제 자신에게 물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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