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오두막 편지 (법정著. 이레출판사刊)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합니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이 어지러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비행기는 바람의 저항이 있어야 날고 자동차는 路面(노면)의 저항이 있어야 달릴 수 있습니다. 어지러운 이런 세상이야말로 진짜 좋은 시절이 아니겠습니까? 무사안일한 태평세월보다는 亂世(난세)야말로 그 저항을 통해서 살맛 나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전투이고 회사일이나 집안일도 전쟁입니다. 사내자격시험 출제도 시간과의 전쟁입니다. 주어진 일정까지 출제를 하고 모범답안을 작성하고 출제문제를 선택하여 시험지를 만들고 채점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30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시간과의 전쟁터에서 역전의 용사답게 모범을 보여주신 출제위원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 잘해주셔서 저는 30명의 知人(지인)들을 만들기 위해서만 노력했으니 쉬운 전쟁이었습니다.

집안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의 성장도 빠르고 사춘기도 빨리 와서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들었던 마음의 잣대를 들이대면 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식사하면 더치페이(dutch pay)를 합니다. 제가 클 때는 상상도 못 했던 현상이지요. 친구들과 주머니를 털어 많던 적던 버스비만 남기고 저녁을 같이 먹던 시절의 잣대로는 요즘 아이들 생각을 재볼 방법이 없습니다. 아이에게 넌즈시 물어봅니다. 돈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니? 슬그머니 빠지든지 친한 아이에게 돈을 빌리지요. 당연한 듯 이야기하는 아이들과 앞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니 전쟁이고 亂世(난세)입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어려운 難題(난제)들과, 집에서는 아이들과 아옹다옹하며 살아가다 보면 그것이 행복이고 살아가는 맛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의 文明(문명)은 머리만을 믿고 그 머리의 회전만을 過信(과신)한 나머지 가슴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중심에서 벗어나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가슴이 식어버린 문명은 그 자체가 크게 병든 것입니다.

- 中略(중략) -

인생에는 정년이 없습니다. 흥미와 책임감을 지니고 활동하고 있는 한 그는 아직 현역이며 인생에 정년이 있다면 탐구하고 창조하는 노력이 멈추는 바로 그때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다름이 없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人生(인생)의 終着(종착)을 告(고)하는 時點(시점)에서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空手來 空手去(공수래공수거)라고 하지만 웃으며 臨終(임종)을 맞을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자가 참 삶을 살았다고, 이제 죽어도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한동안 어렵다가 요즘 사업이 잘 나가는 후배와는 1년에 한 번 정도 저녁식사를 합니다. 작년에 후배가 물었습니다. 형님! 퇴직 후에는 무엇을 하며 사실 겁니까?

나는 퇴직하면 통영, 남해 또는 제주에 내려가 글 쓰는 연습을 하려 한다. 글 쓰는 방법을 정식으로 배울 수 있다면 바람직하겠지. 또한 주위를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고...

네,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도 만들고 모은 재산으로는 불우한 이웃도 돕고... (후배는 요즈음 예술분야 야간대학원에 다니며 독립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로만 생각하는 반면, 상당한 매출의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뜨거운 마음을 갖고 은퇴 후의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 착실하게 준비해 가는 후배가 부럽고 자랑스럽습니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일이 있을 때 혹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관계입니다.

얼굴을 맞대고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만한 친구가 없는 것보다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같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주고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움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울진을 떠 난 후 일산 자유로가 보이는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술 취해 들어온 날 자유로의 불빛을 보면 한숨에 달려가 오징어회 한 접시 썰어놓고 정다운 친구들과 소주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영광을 떠나온 후에도 같은 생각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단골로 다니던 포장마차에서 연탄화덕을 가운데 두고 오순도순 모여 앉아 뜨거운 국물 후후 불어가며 소주 한잔 하던 모습을 그려봅니다.

혹시 저에게 同性愛的 自我(동성애적 자아)가 존재하는지 몰라도 울진과 영광에서 苦樂(고락)을 같이하던 동료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합니다. 매일 안전하라고 잔소리만 늘어놓던 제가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아! 가을이 저만치 지나가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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