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 설화, 아이들과 와라와라
맞는 정의인지 모르겠으나 ‘詩(시)는 精製(정제)된 言語(언어)의 藝術(예술)’이라 뜻을 이해하기 어렵고, 읽고 음미하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시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맞춘 해석만을 암기하도록 강요받았던 세대이기에 붉다고 느껴도 파란색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矛盾(모순)의 時代(시대)를 살아왔고 그로 인해 고등학교 국어시험을 봤을 때도 시와 관련된 문제가 가장 어려웠었다고 기억됩니다. 이렇듯 시에 대한 선입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는데 지난 8월 경주 족구대회 참관차 내려가며 읽은 시는 선입관을 바꾸는데 충분했습니다.
치자꽃 설화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각 되에 몰래 숨어서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글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아 쑥꾹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장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도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그 이후(이가서刊)
치자꽃 설화는 가슴 저린 애정영화 한 편을 이야기하듯 그림 그리듯 써 내려간 읽기 쉬운 시입니다.
첫 문장부터 가슴이 촉촉해집니다. 속세의 연인을 잊기 위해 설운 눈망울로 불경을 외우는 스님 목소리가 처절하게 들립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면서도 떠나기를 주저하는 여인의 젖은 어깨가 너무 서럽습니다. 혹시 읽는 분에 따라 스님이 여인을 따라가서 破戒(파계)할 것 같다는 느낌이라고 말하실 수 있으나 그것은 읽고 느끼는 분들 자유입니다.
아래 시도 매우 쉬운 시입니다. 연희동 언덕을 뛰어놀던 4남매를 보며 先親(선친)께서 쓰신 시입니다. 개구쟁이 아이들이 해 지는지 모르고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저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옛날이야기라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 아린 풍경입니다.
아이들과 와라와라
임진수
해 질무렵
아이들은
와라와라.
어스무레 기어오는
땅거미도 못오게.
아이들은
뛰며
와라와라.
옷자락에 날리는
금빛 바람.
아이들은
뚝 딱
와라와라.
두 볼은
타듯이 붉은 노을.
와아라 와라와라.
이,
상,
하,
고,
아름다운,
도,
깨,
비,
나라.
** 가족 납골묘를 만들 때 정면에 가족사진을 넣는 대신 선친께서 쓰신 위의 시를 새겨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