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가에 앉는 마음 Dec 16. 2023

87. 일기일회(법정著, 문학의 숲刊)

지금 이 순간은 生涯(생애) 단 한 번의 시간



 일기일회는 지금 이 순간은 生涯(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을 뜻하는 말로 모든 시간과 모든 만남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는 法頂(법정) 스님의 글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법정스님의 글은 정신을 맑게 깨우치는 글들이 많지만 지루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제 자신에게 俗世(속세)의 때가 너무 많이 묻어 있는 것이 탄로 날까 두려워하는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법문집은 목사님 설교집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목사님 설교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가끔 정신이 맑을 때 한 두 가지 좋은 말씀을 캐치하는 사이비 기독교신자 입장에서는 법문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精讀(정독)하는 것은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 門外漢(문외한)이 법문을 읽으려니 앞뒤 문맥을 연결하기 위해 신경 써야 하고 行間(행간)의 意味(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읽어야 하는, 진땀 나게 하는 책이지만 아마도 집사람이 저의 신경질적인 성격을 순화시키고 잠재우기 위해 권해준 책인듯하여 인내심 갖고 읽어 봅니다.


 성철스님의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 같은 禪答(선답)같이, 高僧(고승)들 법문집은 ‘이 꽃과 잎과 새들은 어디서 오는가? 이 나무와 공기와 구름은 어느 곳에서 오는가? 별과 모래와 행성들은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머리 아픈 숙제들만 주는 것이 일반적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님 설교도 목사님 설교와 비슷하게 되어있으며 실생활 사례들을 예로 들어가며 삶의 교훈과 지혜를 전달하고 있어 인내심을 갖고 한 장 두 장 넘겨봅니다. 읽다 보니 저를 두고 하는 이야기 대목이 있는 것 같아 몇 번을 읽어 봅니다. 


 밥 먹을 형편이 되지 않아 아침에 죽을 먹고 점심은 나물로 때우는 절에 마을사람이 찾아와 노스님에게 집안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노스님은 佛像(불상)을 만들 때 쓰라고 施主(시주)로 들어온 구리동판을 마을사람에게 주며 양식과 바꾸라고 합니다. 그러자 젊은 스님들이 부처님께 쓰라고 들어온 동판을 남에게 주면 互用罪(호용죄:시주로 받은 용도 이외의 다른 용도로 전용하는 죄)에 해당한다고 반대를 합니다. 노스님은 너희들이 옳다. 이것은 호용죄에 해당하므로 나는 지옥에 가도 좋다. 그러나 절 아래 주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시주라는 것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먼저 쓰라고 우리가 맡아 갖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小乘(소승)은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이고 大乘(대승)은 보다 큰일을 위해 규약과 규칙 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런 일들을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方便(방편)입니다.(일기일회 본문 p366)

 *주) 방편: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편하고 쉽게 이용하는 수단과 방법


 법문을 읽고 제 자신에게 反問(반문)을 해봅니다. 

기술자들은 물론 고집과 소신이 있어야 하지만 원리원칙에 너무나 충실하여 상기와 같은 경우가 없었는지. 자그마한 잘못을 고치기 위해 소를 죽인다는 矯角殺牛(교각살우)의 사례가 없었는지 지난날을 되짚어 봅니다.

 규정과 절차에 나와 있는 대로 업무를 한답시고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경우는 없었는지? 

 혹은 나 자신의 편의를 위해 어느 경우에는 小乘的(소승적)으로 어느 경우에는 大乘的(대승적)으로 일처리를 하지 않았는지?

 규정과 절차를 지켜야 하는 원자력문화에 익숙해졌고 게다가 code와 standard를 bible로 여기는 품질업무를 한동안 했으니 융통성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닌지?

 요즘도 산업안전보건법, 산재보상보험법, 안전작업기준 등 법령을 다루는 업무를 하면서 규정과 기준에 없는 일이라며 힘들어하는 현장직원들을 못 본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을 뒤돌아 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