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곰손에서 여우같이 날렵한 맛이 탄생한다는 것이 경이롭다.
2개월, 짧은 기간이지만 나주 내려가는 것을 고민했다. 아직 통풍치료가 진행 중이라 음식을 가려먹어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쿠싱증후군이 악화되어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반려견에게 변고가 생길 가능성도 있어 아내 혼자 두고 내려가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걱정하기 시작하면 작은 걱정도 커다란 근심이 되기 십상이다. 한편으로 작은 아이가 재택근무차 집에 왔기에 마음이 놓인다. 마냥 어린아이로 보였던 작은아이로 인해 든든해 보기는 처음이다. 나주행은 오래된 약속 중 하나다. 퇴직 전 후배가 관장하는 업무를 돕기로 했고 절친과 기회 되면 같이 일하며 휴일이면 나주 낚시여행을 하기로 했었다.
단기간이다 보니 숙소 구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오피스텔은 일반주택과 달리 1년 단위로 계약한다. 단기로 빌리는 것이라 정상임대료보다 20% 많이 주겠다 했으나 부동산중개인이 물건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주 혁신도시에는 신축 오피스텔 많지만 임대인이 단기 렌트를 좋아할 리 없다. 임대인 입장에서는 임대료가 다소 낮더라도 안정적인 장기임대를 택하는 것이 정상이다.
내려갈 시간은 다가오고 입맛에 맞는 오피스텔 구하지 못했다. 부동산중개인이 호텔 장기숙박 의향을 조심스레 꺼냈다. 듀플렉스호텔이라 오피스텔과 호텔을 겸한 곳으로 복층이다.
장점은 호텔이니 침구를 별도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며 오피스텔처럼 TV, 인터넷, 세탁기, 냉장고 구비되어 있다. 단점은 가격이 오피스텔에 비해 비싸다는 것이다. 오피스텔을 얻었다면 침대, 커튼을 준비해야 하고 임대기간이 끝나면 처분도 골치 아프다. 오피스텔 임대료에 침대, 커튼 구입할 금액을 호텔에 줬다 생각하기로 했다.
혼자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독신들이 미니멀하게 산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보는 것과는 다르다. 가족이 사나 혼자 사나 있을 것은 다 있어야 한다. 식기, 샴푸, 세제, 걸레, 수세미, 행주... 개수와 크기가 다를 뿐이다.
속내의부터 욕실, 주방용품, 경추 베개, 파자마..., 이번에는 기간이 짧아 짐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여행용 트렁크와 보스턴 백 2개. 얼마나 줄였는지 절친과 차 한 대로 내려오는데도 승용차에 여유공간이 많다. 부피 많이 나가는 옷이 없으니 부피가 대폭 줄었다.
나주에 동행한 절친은 커피로스팅 전문가다. 여러 명의 제자 중 두 명이 나주에서 열심히 커피를 볶고 있다. 한 명이 호텔 근처에서 공유 커피로스팅샵을 운영하고 있다. 아직 본업이 회사원이라 휴일에만 오픈하며 평일에는 가끔 불이 켜져 있을 때가 있다. 저녁식사 후 호수공원을 한 바퀴 산책하고 호텔에 들어갈 즈음 길거리에 커피 볶는 냄새가 퍼져있으면 후배가 있다는 신호다. 예고 없이 공방에 방문했다.
나주 영산강변에서 열리는 나주축제에 초대받아 나주보리를 첨가한 디카페인커피를 개발했단다. 공방 안에 온도별로 보리를 볶아 놓은 것을 보니 최적의 맛을 찾는 과정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현재는 연수원교수를 하고 있지만 연구원출신이라 그런지 새로운 커피맛을 개발하는 과정이 연구과정과 비슷하다. 전직은 속이지 못한다. 새로 개발한 보리 커피는 입안에 보리 단맛이 여운으로 감돈다. 디카페인 커피의 밋밋한 맛 대신 보리의 구수함과 달콤함이 자리 잡았다.
홍어거리 맞은편 영산강변에서 열린 2023 나주축제장을 찾았다. 새로 개발한 보리커피와 게이샤커피가 있어 가격이 비싼 게이샤커피를 팔아줬다. 허니 로스팅(honey roasting: 커피과육을 조금 남기고 발효시킨 후 볶는다.)을 해서 그런지 달콤한 맛과 향기가 입안에 퍼진다. 후배는 정년퇴직까지 많은 기간이 남았지만 이번에 개발한 커피가 대박 나 퇴직을 앞당겼으면 한다.
게이샤커피가 일본하고 관련된 커피로 착각했으나 에티오피아 Gesha라는 지역명칭에서 유래되었단다. 다른 커피에 비해 비싼 가격의 커피다.
커피로스팅하는 또 다른 후배는 매일아침 모닝커피를 내려 하루도 빠짐없이 정성스럽게 배달하며 문안인사를 한다. 수제요플레, 누룽지, 나주 배와 사과도 진상하고 홍어와 갈치조림도 대접한다. 투박하고 무뚝뚝한 겡상도사나이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사실 이 친구는 일관되게 무뚝뚝해 나긋나긋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30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믿어주고 맡겨놓으면 책임감 있게 일을 처리한다. 잔소리를 하는 대신 울타리를 넓게 쳐주고 믿어주기만 하면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하며 스스로 마음을 연다.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집에 올라가는 날이면 갓 볶은 커피도 갖고 온다. 무르익은 로스팅기술로 커피를 볶아내니 매일 아침 입이 즐겁다. 후배가 내려오는 today's special은 酸味(산미)와 스모키, 과일향으로 어우러진 현란한 맛을 뽐낸다. 커피 로스팅은 기복 없이 동일한 맛을 구현해야 하므로 섬세한 감각과 손재주가 필요한데 이제는 사업해도 성공할 만큼 경지에 올랐다.
투박한 곰손에서 여우같이 날렵한 맛이 탄생한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나저나 나주 떠날 날이 다가오는데 뚝뚝한 겡상도 사나이가 입맛을 버려놓아 큰일이다. 인스턴트커피는 물론이고 스타벅스나 테라로사 같은 프랜차이즈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