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은 속세의 시간은 4억 3200만 년
신정부 들어 소망교회출신 S-라인, 고소영내각이니 해서 말들이 많았고 최근에는 조계종 총무원장님 차를 검문했다고 해서 종교편향주의적 정권이니 하는 비판여론이 있어 종교이야기를 꺼내기 거북스럽습니다. 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면 금기시되고 있는 화제 중의 하나인 종교이야기도 나올 수 있고 여자분들이 질색하는 군대와 축구이야기도 나올 수 있습니다. 사이비 신도이자 얼치기 신도지만 저도 기독교 모태신앙을 갖고 있어 기독교이야기를 하면 종교편향이라고 구설수에 오를 수 있으므로 불교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연과 만남을 소중히 하라는 말씀이겠지요. 퇴직하신 김홍일 선배와 만남은 매우 짧았습니다. 신입사원시절 현장 설명을 위해 코흘리개인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김 선배는 얼마나 부지런한지 저에게 설비에 대한 간단한 설명 후 살펴보라 하고는 쏜살같이 달려가 작업의뢰서 한건을 처리하고 올 정도로 빠르고 부지런했습니다. 제가 사업소배치 3일 후 품질부서로 발령이 났으니 김선배와의 만남과 인연은 옷깃만 스칠 정도로 매우 짧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김 선배는 울진원자력발전소로, 저는 본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김 선배의 사고소식을 들었습니다. 허술하게 조치한 개구부에 빠지는 추락 사고를 당해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 대구에서 서울로 이송될 만큼 위급하다는 이야기, 3일간 짧은 인연이지만 가슴이 아팠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병실을 옮겼다기에 병문안을 갔습니다. 먼저 다녀오신 분이 하반신 전체에 깁스를 하고 있고 영영 걷지 못할 것이라고 귀띔을 해줬습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섰는데 김선배는 의외로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임 과장, 그래도 소변을 내 힘으로 볼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떨어졌을 때는 죽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팔도 움직일 수 있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 하면서 웃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저는 김선배의 밝은 얼굴에서 다시 일어나 걷게 될 것으로 믿었고, 얼마 후 그는 목발에 의지했지만 짧은 거리는 자력으로 걷는 기적 같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사고 후 김선배는 안전관리업무도 담당하고 안전교육도 하러 다니며 회사생활을 하다가 퇴직 후 자그만 사업체를 차려 사장님이 되었습니다. 정비용 공기구와 자재도 취급하지만 산재환자 출신이 안전장구도 납품을 하니 인생의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제가 영광원자력발전소에 근무할 때, 납품할 일이 있어 왔다는 김 사장님은 잊지 않고 찾아오셔서 음료수 한 박스를 놓고 가십니다. 제가 차를 몰고 집을 오간다 하니 혼자 운전하면 졸음이 오기 쉽다면서 본인이 듣던 개그테이프를 건네주기도 합니다. 작년에 경영자과정 교육을 받기 위해 본사로 발령을 받은 후 집에 편지가 한통 도착해 있었습니다. ‘임 부장, 오랜만에 가족들과 같이 살게 되었으니 집사람에게 잘해야 하네,’ 짧은 메모와 함께 워커힐쑈 관람권 2매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3일간의 짧은 만남이지만 참으로 오래도록 지속되는 인연으로 선배님에게서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五百劫(오백겁)의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劫(겁)이란 셀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표현한 것으로 수치적으로는
o 사방 40리의 성에 겨자씨를 가득 넣고 100년에 한 알씩 꺼내어 겨자씨가 없어지는 시간을 겁이라 하고 속세의 시간은 4억 3200만 년입니다.
o 또 다른 표현으로는 백 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이 사방 40리의 바위를 닳아 없어지게 하는 시간이 겁이라고 하기도 하며
o 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집채만 한 바위를 없애는데 필요한 시간을 겁이라 하기도 합니다.
겁이란 추상적인 시간이라 사람에 따라 정의하는 것이 약간씩 차이가 나지만 법정스님께서 정리하신 것을 커닝해 봅니다.
o 같은 나라에 태어나는 인연은 천 겁
o 하루길을 동행하는 인연은 이천 겁
o 하룻밤을 한집에서 자는 것은 삼천 겁
o 같은 민족으로 태어나는 것은 사천 겁
o 한마을에 사는 것은 오천 겁
o 하룻밤의 동침은 육천 겁
o 부부의 연은 칠천 겁
o 부모와 자식은 팔천 겁
o 형제의 연은 구천 겁
o 스승과 제자 사이는 만 겁의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매주 메일을 주고받는 여러분과는 얼마나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일까요?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것은 한마을에 사는 것과 같으니 오천 겁 이상의 인연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