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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May 14. 2024

864. 재주가 메주, 곰손이 로스팅을...

‘이 참에 취미 삼아 커피 로스팅을 해볼까?’

 원자력, 화력, 수력 등 국내외 전발전소를 정비하는 회사에 오래 근무했다. 발전설비가 설계된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유지관리하는 업무를 정비(maintenance)라고 한다. 정비라는 업무는 생활과 근접한 예로 자동차정비를 들 수 있으나 실제로는 조금 더 복잡하다. 고가의 자동차라 해도 금액으로는 億(억) 대에 지나지 않으나 발전소는 兆(조) 단위이므로 더욱 복잡하고 정밀하다.

 발전소 정비는 자동차 정비보다 복잡하고 전문적이다. 경험해 보니 자동차정비보다 병원에서 진찰하고 수술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병원 전문의같이 분야별 전문가를 양성하여 진동, 발전기, 터빈, 원자로, 비파괴, 용접 등 정비분야가 세분화되어 있다. 사용하는 장비도 병원과 유사하여 로봇과 내시경장비, 초음파검사, Xray검사 등 비파괴진단장비를 사용한다. 물론 소변검사와 혈액검사같이 시료분석도 하고 전자현미경을 사용해 조직검사를 한다.


 작업유형이 너무 많아 손으로 하는 작업이 절대적으로 많다. 발전설비에 특이한 trouble이 발생되면 작업방법과 장비를 새로 고안해 내야 한다. 전문가들이 모여 치열한 토의와 검증을 통해 안정성이 인정되면 새로 고안된 기술을 적용한다. 토의와 검증에 소요되는 인건비만 해도 자동차값을 초과하므로 자동차라면 폐차시켜야 하다. 원자력발전소를 하루 정지하면 손해 보는 전기판매금액만 벤츠 10대를 폐차시키는 것과 같으며 전기는 수입할 수도 없기에 머리와 손기술, 시간을 총동원해야 한다.

 로봇과 진단장비 역시 인간이 조작하므로 결국 기술은 손끝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동료들 손재주가 비상했다. 물론 선천적으로 감각이 발달된 이유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부분도 있다. 매일 기계와 씨름하다 보니 1/100mm 단위까지 손으로 맞춰내는 정밀함을 보유한 직원도 있다. 수리불가능할 것 같은 설비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정비하는 것을 보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술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예술적’이라 해야 的確(적확) 한 것 같다.


 35년간 정비회사생활을 마감했지만 내손으로 땀 흘려가며 현장에서 정비하는 일을 해보지 못했다. 물론 원자력발전소 현장에도 오래 근무했지만 입사초기부터 퇴직할 때까지 손에는 볼펜이 들려있었다. 현장팀장시절 직원들을 돕기 위해 공구를 잡으려 하면 직원들이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다른 팀에서 보면 직원들을 욕한다면서..., 물론 오래전 일이니 팀장이 직접 정비하는 것은 이상한 풍경이었지만 속내는 곰손의 실력을 불신한 것 아니었을까?

 직접 손으로 정비하지 못했지만 교육을 받았으며 회의에서 배우고 눈으로 본 것이 많다. 발전소에 적용되는 기술의 범위를 좁히고 규모를 줄이면 집에서 발생되는 자질구레한 일과 거의 흡사하다.


 문제는 정비하는 사람들 속설에 ‘전기쟁이집에 가면 전등이 깜박거리고 기계쟁이 집에 가면 수도가 샌다.’는 말이 있다. 발전소는 반짝반짝하게 관리하면서도 퇴근하면 손가락하나 꼼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사택에 살 때는 내 손으로 형광등을 교체한 적이 없다. 집에서 삼겹살 구워먹자고 하면 직원들이 필요한 자재를 들고 와 손을 봐줬다.

 하지만 퇴직 후 자질구레한 집안일은 혼자 처리한다. 등기구도 교체하고 방문 손잡이도 교체한다. 전기공학을 전공했으므로 등기구나 콘센트 교체는 기본으로 할 수 있으며, 명색이 정비전문회사에 35년 정도 근무했으니 기계적인 부분도 어깨너머로 배워 웬만큼은 할 수 있다.

 오래되어 페인트가 들뜬 욕실문에는 시트지를 바르고, 낡아서 니스칠이 벗겨진 원목마루에 바니쉬도 바른다. 그나마 이 정도 할 수 있는 것은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실력이다. 물론 전문가의 깔끔한 솜씨는 흉내 내지 못한다. 입과 볼펜만 갖고 35년 정비회사 생활을 했으니 손은 곰손이며 재주는 메주다.


 커피 로스팅하는 후배들이 injerto nativo, yirgacheffe aricha, decaffeination. ‘인헤르또와 아리차를 2:1, 3:1로 블랜딩해도 맛있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원두 3종을 보내왔다. 3:1로 블랜딩 하니 적당한 산미에 스모키 한 과일향이 난다. 핸드 그라인딩하여 적게 추출해서인지 쓴맛과 떫은맛은 따라오지 않았다.

 볶은 후 3일 정도 숙성시키고, 시간이 흐르지 않은 신선한 커피는 고유의 향과 맛이 풍성하고 싱그럽다. 미각과 후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꽃향기와 과일향기까지 잡아낸다. 원두에서도 향이 그윽하고, 그라인딩, 커피 내리는 과정에서도 향이 좋다. 후배들은 커피로스팅, 수제 맥주, 너트 로스팅, 청주까지 문어발식으로 발을 넓혔다. 손재주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손재주 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다. 손으로 하는 기술이라고는 낚싯바늘 묶고 짜 맞추는 것 밖에 하지 못한다. 볼펜과 입으로 밥 벌어먹다 보니 손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렇다고 말을 잘하지도 못한다. 


‘이 참에 취미 삼아 커피 로스팅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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