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Prologue

by 바삭새우칩

봄이 왔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동안 날이 맑았던 것 같긴 한데, 따뜻했다는 기억은 없다. 꽃이 피 었는지 조차 모르겠다. 벚꽃은 아마 일주일쯤 피었다가 바로 졌을 거다. 회사 앞 벚나무는 올해에도 분홍 꽃잎보다 초록색 이파리가 더 많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봄은 잊혀진 채로 지나갔다. 그리고 요즘들어 낮이면 등이 후끈 거린다. 바닥엔 습기가 스며 있고, 손에 쥔 스마트폰이 묘하게 손에 달라붙는 느낌이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손잡이는 이미 누군가의 땀이 묻어 있었고, 퇴근길 버스안은 사람들의 체온과 내뿜는 숨결로 벌써부터 갑갑함과 끈적함이 느껴진다. 장마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비는 아직 본격적으로 오지 않았지만, 냄새는 난다. 물비린내 같은, 금속이 삭은 냄새 같은 게 코끝에 닿는다. 빨래를 하고 햇볕에 바싹 말린 냄새가 아니라, 그늘에서 말리다 만 옷을 그대로 입고 나온 듯한 그런 퀴퀴한 냄새다.


사무실 안에선 그런 냄새와 비슷한 게 난다. 에어컨을 켰더니 시원한 쾌적함보단 한해동안 묵은 곰팡내와 함께 퀴퀴함은 더해간다. 복사기 쪽 벽지가 들떠 있었고, 형광등은 아침부터 깜빡였다. 책상 뒤 창가엔 언제부터인가 물고인 자국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도 이상하다고 하지 않으니, 나도 그냥 넘긴다.

요 며칠은 이상할 정도로 신경에 거슬리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땀으로 샤워하고 나온 듯한 누군가의 젖은 몸이 버스에서 내 옆에 바짝 붙었을 때, 땀이 채 마르지 않은 옷깃이 손등을 스치고 간 순간 이후 부터 치명적인 세균에 감염된 듯한 불안함과 찝찝함.


출근 전 화장실에서 물기에 젖은 슬리퍼를 신었더니 양말뒤꿈치가 축축해져 하루 종일 진창에 빠진듯 한 기분이 들었다.


택배 상자를 열었을 땐 박스 테이프에서 접착제와 곰팡이 냄새가 났고, 편의점 냉장고에서 꺼낸 캔음료는 손에 끈적한 물기를 남겼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건물들 사이, 오후 세 시에도 어슴푸레한 하늘을 보며 마시는 커피는 얼음이 녹아 밍밍 해져 있었고, 입안은 말랐고, 손끝은 눅눅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럴 때 ‘날이 꿉꿉해서 그래’라고 말한다.


그 말이 꽤 괜찮은 변명이긴 하다. 이상하게 몸이 찌뿌둥하거나 끈적거리고, 냄새도 나고, 별일 아닌 것에도 기분이 상하고 짜증나는 날. 전부 장마 때문이면 편하니까.


근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이게 다 ‘날씨 탓’일까? 혹은, 그게 ‘날씨’라고 부르는 것의 본모습이 아닐까? 기상청에서 말하는 비구름대가 아니라, 이 도시의 틈에서 올라오는 무언가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건 아닌가?


나는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파일을 열고, 같은 회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표면에는 아주 얇은, 젖은 막이 끼어 있다.


오늘 출근길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엎어진 채 도로변에 있었는데, 유난히 털이 깨끗하더라. 눈이 마주친 건 아니지만, 괜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걸 기억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창밖에선 곧 비가 시작될 것처럼 어두워졌다. 나는 다시 커피를 마시러 일어 났고, 복사기 위엔 아직도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기상청은 올해 장마가 예년보다 이르게 시작되고, 꽤나 오래 지속될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휴가 계획이 꼬였다고 투덜대고, 침수 위험 구역엔 다시 모래주머니를 쌓거나 차수막으로 대비 해야 한다고 했다.


장마철 특유의 습도는 단순히 불쾌한 걸 넘어선다. 그것은 사람의 기분을 흐리게 만들고, 생각을 굳게 만들고, 대화를 줄이고, 표정을 엷게 만든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은 없고, 커튼은 젖은 천처럼 늘어져 있다.


나는 문득, 이 모든 짜증과 권태, 이유 없는 피로감과 예민함이 이 도시를 스치고 가는, 이름 없는 어떤 존재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장마는 기후가 아니라, 저 멀고도 깊은 곳에서 몸을 뒤척이는 이름없는 그 존재의 기척 이었다.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습기처럼 침입하고, 냄새처럼 퍼지고, 결국엔 생각마저 눅눅하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들은 그런 이야기들이다. 이 도시에 숨어 있는 미스터리와 불쾌감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얽히고, 그들의 내면을 흔드는지. 이제 이야기는 나를 떠나, 다른 인물들 속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그들의 눈을 통해, 그들만의 괴기스러운 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겪는 이 불안과 불확실함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풀어 나갈 것이다.


창문을 빗방울이 '두둑, 두둑' 두드리기 시작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이 소설은 원래 웹소설 공모전에 출품했었으나, 여러 요소를 새롭게 각색하여 재구성한 후 다시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설 중간중간 삽입되는 사진과 이미지는 AI 이미지 생성 도구와 무료 이미지 사이트를 통해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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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