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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큐마 Feb 27. 2022

명랑큐티마초걸의 모험

큐티마초가 되어버린 김새우

경상도에서 PD로 일을 한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나이 어린 여성으로 해야 할 역할을 요구했다. 애교, 눈웃음, 귀여움, 상냥함 등이었다. 20 중반, 어리고 미혼인 나는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그 동시에 나는 지시하고 이끌어나가야 하는 PD의 역할도 해내기를 요구받았다. 그리고 이건 대부분 마초 남성의 전유물로 받아들여졌다. 마! 찍으라면 찍으라! 결국 나는 명랑 큐티 마초 걸이 되어야 했다. 그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가 시작됐다.


그 줄을 잘 타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한 번 넘어지자 국장급 PD인 선배가 날 불렀다. “야, 네가 어려워하는 그 카메라 선배, 정년까지 좀 남았어. 결국 네가 그 인간을 다룰 줄 알아야 해.” 그 선배와 같이 촬영을 나가자,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나와 카메라 선배 둘이서 드론 촬영을 해오라고 했다. 카메라 선배는 드론을 띄우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그는 내가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드론을 띄워달라고 말하자, 한참을 툴툴대다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내는 지금 내 능력의 150%를 하고 있다. 더 요구하면 나 손 떨려…” 그렇게 나는 시작하지도 못한 마초성을 접고 다시 큐티한 나로 돌아갔다. “와! 선배님 그럼 이쪽으로 혹시…? 와!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괜찮은 샷이 나오면 박수를 쳤다. 드론을 내리고 다른 스케치 샷을 찍을 때도 나의 감사는 계속되었다. “와! 현판 클로즈업! 와!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그렇다면 건~물~ 풀~샷~ 부탁~ 해요~ “응. 찍을 거야.” “와! 감사합니다!” 정말 1컷 1 감사를 해가며 겨우겨우 오전 촬영을 마쳤다.


오전 촬영을 마치고 카메라 선배는 점심을 먹으며 선배에게 찍은 드론 샷을 보여줬다. 선배는 감독에게 이야기하는 대신 먼저 나를 봤다. 선배가 말했다. “잘 봐, 지금부터 보여주마.” 저 멘트를 들은 다음 내 머릿속은 허니 제이로 가득 찼다. “잘 봐, 언니들은 이제 시작이야” 이런 감동적인 멘트를 날릴 수 있는 방송도 있는데,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라는 생각을 하던 중, 선배가 카메라 선배를 들들 볶기 시작했다.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제대로 찍으라며, 불같이 화를 내며 마초의 면모를 보여줬다. 나는 두 선배의 눈을 피하며 곰탕을 입에 쳐 넣었다.


그렇게 산에 올라 다시 드론을 띄우기로 했다. 카메라 선배는 전보다 능숙하게 드론을 띄웠다. 그때였다. “아, 여기로 가까이 와주세요! 저기요! 여기 드론 금지 구역이라 계속 촬영하시면 경찰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카메라 선배는 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론 내립니다!” 선배는 카메라 선배를 하찮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선배는 인터폰으로 가까이 다가가 물어봤다. “저, 여기만 빼고 저쪽으로 띄울 건데 괜찮을까요?” “네, 그건 괜찮은데 여기가 국가 보안 시설이라서요~”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카메라 선배를 보고 있었다. 정말 손을 떨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뱅뱅 도는 드론과 카메라 선배를 번갈아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속으로 빌기 시작했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떨어져라….” 선배처럼 무조건 갈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와 씨!” 갑자기 카메라 선배가 소리를 질렀다. 하늘에 있던 드론이 보이지 않았다. 산속 어딘가로 드론이 추락했다. 나는 마스크 속으로 활짝 웃었다. 그러나 눈은 슬픈 눈을 했다. 카메라 선배를 보조하는 오디오 맨들이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 슬펐다. 산을 억지로 타는 모습이 마치 두 마리의 스라소니 같았다. PD인 우리 선배는 모든 것을 포기한 눈이었다. 오디오 맨들이 암벽 등반을 하며 드론을 찾는 동안 카메라 선배는 결국 신호를 다시 잡아서 드론을 구출했다. 카메라 선배가 말했다. “아니… 쟤네가 전파 방지 빔…. 이런 거 쏜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우리 선배와 카메라 선배가 언성을 서로 높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큐티고 마초고 나발이고 그냥 퇴사하고 싶었다.


촬영본을 받아보자 나는 실성한 웃음만 나왔다. 드론이 처참하게 굴러 떨어지고, 산을 한참 구르다가 다시 하늘을 나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화면은 멀미가 날 정도로 흔들렸다. 편집실이 떠나가라 웃다가 갑자기 멈췄다. 나나 드론이나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되어서다. 올바르게 멋지게 날 수 있는 드론이라는 기기는 이 사람 저 사람에 치여 산도 물도 찍지 못하고 추락했다. 나도 명랑 큐티 마초 걸이 되려다가 그냥 추락한 고장 난 드론이 될 것만 같다. 나라는 존재는 어느 순간 지워지고 해내야 하는 역할들만 남았다.


나는 추락 직전의 드론 같았다. 그러나 내가 추락하면 선배들은 좋아하며 박수를 칠 것이다. “드디어! 얘가 이 일에 진심으로 하다가 죽었어! 멋진 피디야! MZ 스럽지 않은 모습 멋져!” 가학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로그아웃, 퇴사할 용기가 없다. 신호를 잃을 용기가 없어서다. 추락한 드론은 카메라 선배의 신호를 받아 날아오르지만, 나는 드론이 아니다. 신호 잃은 나를 일으키는 것도 내 몫이다. 이 일만을 바라본 세월이 너무 길어, 대안이 없어서, 용기가 없어서 퇴사할 수가 없다.


내 생일에 나는 나를 해치기 전에 퇴사한다는 친구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다친 지 오래되었다. 이미 다쳤음에도 나가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명랑 큐티 마초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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