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는 고래로 태어날래
엄마, 나 이번 생은 망한 거 같아. 다음 생에 태어나면 여자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살고 싶어. 막 그런 거 있잖아,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 그런 거 하고, 최대한 결혼은 빨리, 특히 누군가 가정주부를 시켜준다고 한다면 바로 빠르게 얼굴도 안 보고 결혼하고, 그러고 나서 히피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 “다음 생은 없어.” … “넌 김큐마 사비나 야. 우리에게 다음 생은 없다고.” 아! 엄마 진짜 그냥 상상도 못 해?
사실 그런 삶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가끔씩 반대급부의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올라온다. 경상도에서 PD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입사 후 한 달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여자가 할 일은 따로 있었구나…^^ 내가 너무 큰 꿈을 꾸었구나.” 워라벨이 중요하다며, 자신은 가늘고 길게 가고 싶다고 했던 친구들의 뒤에 후광이 보였다. “너희가 옳았구나!” 여자는 역시 자격증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CPA를 준비하거나, 약대를 다시 간다고 하거나,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취업 1,2년 더 걸리는 것이 뭣이라고, 이렇게 서둘러서 경상도에 자리를 잡았는지.
어쩌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엄마. 엄마 나한테 디즈니 안 보여줬잖아. “아냐 보여줬어! 뮬란 봤잖아!” 우리 엄마는 공주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나는 유치원에서 귀동냥으로 공주 이야기를 듣고 아는 척을 했다. 백설공주는 사과를 먹고 죽은 애, 신데렐라는 칠칠치 못하게 신발을 두고 온 아이,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그대로 잠만 자고, 인어공주는 바다든 땅이든 빨리 하나를 못 고른 아이, 미녀와 야수는 땡잡은 야수와 편견 없는 미녀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대신 뮬란은 모든 장면이 프레임별로 기억난다. 탐스러운 말의 꼬리와 뮬란의 짧은 머리, 아버지를 대신해서 칼을 휘두르고,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그 눈빛. 그 때부터였는 지도 모른다. 내가 아버지 뻘인 카메라 감독들을 구슬리고 대신 칼을 휘두르며 촬영장에 나갈 운명이 된 것은.
문제는 운명이 곧 지향이었던 것이다. 학교 안에서는 얼추 뮬란 같았다. 그런데 사회에 나오고 나니 나는 뮬란이 아닌 치와와였다. 담담한 척하며 한 톤 낮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낑낑낑! 집에 가고 싶어용!” 정말 집에 가고 싶었다. 전기담요가 있고, 내 귀여운 이케아 강아지 인형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 안의 안정지향적인 여성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나를 놀랍게 했다. 나는 늘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었다. “여자가 하는 일, 남자가 하는 일이 따로 있냐!” 외치며 멋지고 우아하게 남성들을 부리는(?) 여성이 되고 싶었다. 꿈이 무진장 컸다는 것만은 정확하다.
엄마, 나 그냥 막살래. “네가 생각하는 막사는 게 뭔데?” “어… 그냥 막 밤에 놀고? 나도 몰라. 그냥 막살고 싶어.” “그게 막사는 거야?” 막사는 게 뭔지도 잘 모른다. 내가 원하는 도착지에 당도했지만 나는 내가 뮬란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주들도 아니라는 것만 깨달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큐티 마초 사비나다.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는 없는 걸까? 엄마 눈에는 이런 질문을 하는 내가 그저 뽀빠이처럼 커다란 피터팬 같아 보이는 것 같다. 엄마 세대에는 나라는 사람을 조직에 맞춰 살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말과 그래도 나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나는 나를 옭아맨다.
엄마, 나 지금 다니는 회사가 내 평생 중에 제일 좋은 회사일 것 같아. 그냥 기대하지 마… 나 곧 만 1년이잖아. 그땐 퇴직금 나오니까 그때 그만둘래… 곧이다… “그래. 월세는 안 받을 테니 집에 와서 살아도 괜찮아. 그냥 행복하게 살아라” 이번 생에 내가 해낸 가장 위대한 업적은 엄마를 포기시킨 것 같다.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는데 20대 중반까지의 내 인생을 다 써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기대다. 나는 지금 실패의 역사를 쓰고 있다. 모든 것이 이뤄진 것 같은 성을 내 손으로 부쉈다. 폐허가 된 성 문 앞을 열고 나선다. “아, 진짜 이번 생은 망했네.”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차라리 지금 내가 한 50살이라면 좋을 텐데, 너무 빨리 알아버렸고, 내게 남은 생이 너무나도 많다. 이 시간이 귀하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가끔은 너무 춥고 무섭다. 나는 폐허가 된 성을 뒤에 남겨두고 사막 위에 혼자 서있다. <듄>에 나온 사막 같다. 여기는 같은 불모지이긴 한데 주위를 둘러봐도 나를 구해줄 티모시 살레메는 없었다. 앞으로 모래바람을 헤치고 나아가기 전에 일단은 경쾌하게 앉아 해가 뜨고 노을이 지고 별이 뜨는 모습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싶다.
듄을 영타로 잘못 치니 EBS였다. 운명인가? EBS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