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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큐마 Feb 20. 2022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

취업하기까지의 김새우를 소개합니다.

그해 가을에는 유독 미세먼지가 심했다. 하늘도 마음도 뿌연 가을이었다. 언론사에서 인턴을 했다. 당시 거리를 누비면서 시민 인터뷰를 따오는 것이 나의 일이었는데, 정말 소모적이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XX에서 나왔는데요~ 운을 떼자마자 귀에 욕이 꽂혔다. “X발”, “X랄” 뭐.. 표현 방식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안 사요”라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 자리를 옮겨 말을 걸고, 몰래 중학교에 들어가고, 서울 시내 온갖 학교에 전화를 돌리고, 교수들의 연락처를 저장했다. MBTI의 앞자리가 i인 나는 이 일이 나랑 맞지 않는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내 마음은 사막 한복판처럼 쩍쩍 갈라졌다. 6개월 동안 대충 그런 일들이 반복되었다.


일이 내 마음을 메마르게 했다면 아저씨들은 내 마음을 찢어놓았다. 그들이 이 문장을 보고 기뻐할 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 “야! 나랑 나이트에 가자!” 우리 부서 모두가 듣고 있었다. “요즘 무슨 나이트야~ 요즘 세상에!” 누군가 말했다. 차장은 이어 말했다. “야! 요즘 어디 가냐 그럼? 클럽? 클럽 가자.” 그러곤 나에게 더 가까이 오더니 속삭였다. “우리 둘이 같이 가면 분명히 무슨 일 생길 테니, 너 퇴사하고 가자.” 다시 두 발짝 떨어지곤 다시 말했다. “그럼 문제 안 되겠지!” 하하하…. 부서 사람들은 내 눈을 못 본 척했다. 그렇게 아무도 막아주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기보다 아주 무력했다.


그 회사에는 학교 선배가 한 명 있었다. 그 선배는 나와 다른 아저씨들을 끼워서 술을 먹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홀짝홀짝 웃으며 술을 받아먹었다. 그날은 1차는 술, 2차는 날계란이 든 쌍화차를 먹었다. 집에 가는 길, 함께 2호선을 탔다. 이번 정거장은 을지로 3가.. 을지로 3가… 그 사람은 취한 척을 하면서 내 팔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순간 뇌가 정지했다. 을지로 3가부터 왕십리역까지는 14분이 걸린다. 그 사람은 뚝섬, 나는 왕십리에서 내려야 했다. 14분 동안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새끼는 나를 덮치려는 듯이 문으로 쓰러지듯 기댔다. 술보다 쌍화탕을 더 많이 먹어 취했을 리가 없었다. 여전히 내 팔을 어루만졌고, 이번 역은 “왕십리, 왕십리역”입니다.라는 말이 울려 퍼지자마자 나는 뛰쳐나갔다. “가보겠습니다.” “응, 조심히 가라.” 나를 지켜보던 수많은 눈길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환하게 술자리에서 웃고 있는 내 사진은 학과 페이스북에 박제되었다.


이 과정 전후로 나는 오래 방황했다. 기자를 꿈꿨던 시절들이 모두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오랜 방황 후 나는 항로를 수정했다. 혼자 일하기보다 같이 일하는 일을 해야겠다, 하루 만에 어떤 사람을 살릴지 죽일지 결정하는 것보다, 적어도 일주일을 두고 한 컷 한 컷 편집하며 신중하게 부각할 것과 흘려보낼 것을 구분하는, 좀 더 섬세한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말은 모두 소거하고 내가 인터뷰를 포기하지 않고 기막히게 잘 딴다는… 내용의 자소서를 썼다. MBTI는 아직도 I로 시작하는데, I라는 글자처럼 내가 나로 온전히 서 있지 못했다. 서 있다가 누웠다가 아크로바틱 수준으로 나를 그들이 원하는 수준에 기괴하게 맞췄다. 근데 어렸을 때부터 내가 억지웃음을 지으면 사람들이 도망가더군. 그렇게 아무리 E스럽게 해도 예능 피디 면접에선 계속 떨어졌고 결국 그냥 제일 차분하게 본 곳에 붙어서 왔다. 내 상처를 잘 빛나게 가공해서 많은 면접을 봤다.


그렇게 시사 PD로 일을 시작했다. 일은 인턴 때보다 훨씬 힘들다. 성장에 수반되는 고통은 셀프였다. 내가 여성이라는 것, 나이가 어리다는 것, 거칠지 않다는 것,,, 등 나의 고유한 특성은 늘 나에게 따라붙었다. 우리 회사의 정직원의 수는 대략 200명 정도다. 그중 정규직 여성의 수는 13명이다. 나와 함께 입사한 동기 4명 중 3명이 여성이었으므로, 오랫동안 정규직 여성의 수는 10명이었던 셈이다. 서울에서 온 피디, 심지어 나이가 너무 어린 피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애인도 없다는 피디. 그들은 나를 외계인 취급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나로 사는 게 상처가 됐다. 나이에 한 번, 성별에 한 번, 성격에 한 번, 생긴 것에 한번, 계속 생채기가 났다. 세수할 때마다 따끔거렸다. 연고를 발라도 태어날 때부터 있는 상처라 없어지지 않았다. 회사 생활은 커다란 거울이었다. 거울을 보기 전까지, 나는 내가 다친 것을 몰랐다. “봐! 너 여기 상처가 있지? 그거 얼른 꿰매 봐.” 어떤 선배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을 들고 내 앞에 세워뒀고, 누구는 바늘을 하나 쥐여줬고, 누구는 옆에서 주기적으로 소독약을 뿌려댔다. 바늘 공포증이 있는 나는 손을 떨며 직접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여자여서 그래? 어려서 그래? 서울 아라 그래?” 손을 떨 때마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꿰맨 것의 간격이 고르지 않다고 호통쳤다. 나는 다시 자르고 계속 꿰맸다. 상처가 아물 리 없었다. 꿰맨 자국만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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