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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큐마 Mar 12. 2022

사랑하는 게 너무 많아

회사에 포켓몬이 나타났다

편집실에 들어가 쓰러지듯 의자에 앉는다. 알트를 눌러 프리미어 화면을 줄였다 키웠다 하면서 알록달록 나노 단위로 잘린 컷들을 구경한다. 그러면서 혼잣말을 한다.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시발….” 가끔 나는 혼잣말을 한다. 나도 모르게. 대부분의 혼잣말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라던가, “집에 가고 싶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라니!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여자들은 사랑한다. 그리고 내 일을 아마도, 사랑한다. 나는 예민한 관찰력과 공감능력, 그리고 부당함을 빠르게 캐치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래서 시사교양 PD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터뷰이를 앞에 세워두고 소수자의 말을 들어주는, 그리고 그들을 옹호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시사교양 PD는 누군가를 옹호해줄 수 없는 직업이라고 소리를 질러줄 텐데! 웬걸 직장에 들어오고 보니, 내가 소수자가 되어 반대편 인터뷰이 자리에 앉는 날들이 더 많았다. 예민한 관찰력과 공감능력, 그리고 부당함을 빠르게 캐치하는 능력은, 그만큼 내가 회사 안에서 불편함을 느낄 일이 많다는 것을 뜻했다.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자동이었지만 배출은 수동이었다. 나는 마치 나쁜 주인을 만나서 고생하는 하수구 같았다. 전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피카츄 같다고나 할까. 선배들은 자꾸 한지우처럼 굴었다. 저기를 향해 번개를 쏘면 된다고, 다른 선배는 여기를 향해 번개를 쏘면 된다고 했다. “투사가 되어야지 새우야.” 그렇지만 나는 번개를 선배들에게 쏘지 않기 위해 참느라 내 남은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선배들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에게 주는 불편함은 어떻게든 삼켜보려고 애를 썼다. 선배들이 면접장에서 본 나는 아마도 투사였을 것이다. 사회의 부정부패에 번개를 내리꽂고, 이 회사의 적폐를 향해 번개를 쏘아내리는, 그런 사람.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냥 볼이 빵빵한 피카츄다. 지우에게 번개를 꽂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실 지우는 성 씨부터 “한”인데, 회사에는 지우가 수십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여기야! 쏘면 돼!” “아니! 저기야! 저기로 쏴!” “여기도 쏘고 저기도 쏘고 해!!” 나는 볼이 빵빵하게 전기를 머금고 눈만 끔뻑였다. 배출되지 못하고 남아버린 전기는 내 몸과 마음을 태웠다. 탄 내를 맡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한지우는 없다는 것. 나는 피카추일지언정 한지우가 싸우라는 대로 싸우는 포켓몬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번개를 내리 쏟을 곳을 결정할 수 있는 포켓몬이다.


일 년 넘게 볼이 빵빵한 채로 눈을 껌뻑이는 피카츄가 회사를 다니고 있다. 선배들은 이런 나를 보고, 내가 아기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냥 자기가 원하는 곳을 향해 쏘면 되는 것을, 계속 빵빵하게 다니는 나를 답답하게 쳐다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데 번개를 쓰고 싶다. 일종의 방어 번개다. 확신이 서기 전에는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라고 할 지라도. 어쩌면 나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든 방송을 보는 사람들도 분노라는 번개를 맞기보다, 감동이라는 번개, 혹은 깨달음이라는 번개를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슬픈 피카츄다. 사랑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자가당착에 이르렀다. 이 일을 계속 견디면서 하는 것도 꽤나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자꾸만 귀를 닫아도 느껴지는 고루한 불합리함을 견디기가 어렵다. 대상 없는 분노가, 전기가, 번개가, 나를 향하고 나를 잡아먹는다. 당신이기 때문에 힘들지만, 이 일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당신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시발….” 오늘도 꽉 찬 시퀀스를 보며 말한다.


*포켓몬 유니버스 안에서 피카츄는 한지우의 포켓몬이다. 한지우가 싸우라고 하면 피카츄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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