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 내가 사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싶다 했다. 장을 본 지 오래되어 냉장고에는 그럴싸한 레트로트 음식 하나 없었다. 먹다 남은 돼지고기에 고춧가루, 올리고당, 소금, 후추로 대충 간을 맞추고 양파, 대파를 가위로 잘라 버무렸다. 유학생 때 자주 해 먹곤 했었다.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고추장 없이 칼칼하고 시원한 제육볶음 만들기”로 유명해진 바로 그 레시피였다.
음식이 익어가는 동안 집에 있는 창문을 모두 열었다. 하필 오늘 산 안개가 집 전체를 감싸 앉은 모양이었다. 미세먼지로 시야 또한 어두웠다. 창가에 놓인 화분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날이 따뜻한 날이면 온몸이 저렸다. 인천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기 때문이었다.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단독주택 꼭대기 층에 거주해서 심지어 "행복"하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커다란 남향 창문으로 맹렬한 햇살이 거실을 비추면 그 테두리 안에서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눴다. 지금까지 집을 다녀간 여러 친구들은 풍수지리, 배산임수, 터의 기운을 빌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창가에는 카랑코에, 선인장, 다육이, 스투키, 금천수들이 하루 종일 햇볕에 몸을 기댔다. 창틀 너머로는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낡은 단독 주택들과 구부러진 골목들, 아직은 건사한 구멍가게, <24시 대중 사우나>, <올 나잇 콜라텍: 롤러스케이트 장>, <오리엔탈 카바레> 문구들이 보였다. 콜라텍과 카바레가 공존하는 상가의 정체를 가늠하며 종종 창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상가는 오랫동안 영업을 중지한 듯했으며 간혹 잠에서 덜 깬 채 창문을 내다보면 센과 치이로에 나오는 대중목욕탕 건물이 연상되기도 했다. 무너진 외벽, 녹슨 간판, 텅 빈 주차장은 그 주변까지 단번에 을씨년스럽게 만들었지만 그 규모와 사업 종목을 고려해볼 때 예전에는 동네에서 쫌 논다는 사람들이 모였던 곳이겠거니 싶었다. 사실은 굉장히 비밀스러운 공간을 목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상상하며 식물들에게 물을 주었다.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쉬면 머리를 앵앵 울렸다. 신기하게도 가지런한 호흡을 몇 번 반복하고 나면 눈앞에 풍경이 더욱 선명해졌다.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다. 거친 날숨이 복도를 메웠다. 계단이 가파른 다세대 주택은 어쩔 수 없었다. 낡은 계단 폭은 딱 손 한 뼘만큼 좁았다. "아이고, 죽겠네"같은 소리가 자주 집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과호흡으로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영도 도중에 지쳐 잠시 쉬고 있는 듯했다.
헐떡이는 그녀를 나는 반갑게 맞았다. 영의 한 손엔 겨울옷이, 한 손엔 강화에서 친구가 보내줬다는 호박 고구마가 들려있었다. 뜸을 들이고 있는 밥솥에선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잘 지냈어?”
”그냥저냥. 엄마는?”
“나야 뭐.”
영은 짐을 식탁 옆에 내려두고 안 보는 척 집안을 빠르게 스캔했다. 거실 겸 침대 방과 작은 옷 방이 전부였다. 부엌과 침대방 사이를 애매하게 분리하는 오래된 미닫이 문은 바람이 불 때마다 맥없이 흔들거렸다.
영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어디에 둬야 할지 고민했다. 2인용 식탁 의자는 작았고 행거는 이미 걸린 옷들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대충 침대에 던져 놔. 영은 코트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식은 제육볶음에 다시 불을 올렸다. 영은 이사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준비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애꿎은 프라이팬만 뒤적거렸다. 저렴한 포장이사를 구했으며 옆 집 사는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먼저 인사를 해봤다고 답했다.
이사를 권한 건 영이었다. 나의 독립을 인정하고 처음으로 이 집을 방문한 날, 영은 꽤 큰 충격에 휩싸인 것 같았다. 호루라기 혹은 전기충격기 같은 호신용품 구매를 권했다. 습관처럼 나는 영의 문제제기를 방어했지만 사실은 귀가 도중 겁에 질렸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언덕길로 종종 술 취한 아저씨들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성희롱, 성폭력 피해를 입거나 물리적 상해를 입는 나를 종종 생각했다. 떨어져 살아도 어쩔 수 없이 난 그녀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영의 살뜰한 걱정에 힘입어 나는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보았다. 월세로는 안전한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 마침 애인 늘보가 중소기업 청년 전세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돈의 지분을 제외한 나머지 돈이 필요했다.
집을 나가고 처음으로 본가를 찾았다. 다소 차분한 옷과 근황으로 영과 아빠 앞에 앉아 조용히 점심을 먹었다. 공부하고 있는 러시아어 자격증은 어찌어찌 딸 수 있을 거 같고 내년 2월에는 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 거라 근황 보고를 마쳤다. 졸업 선물로 무엇을 갖고 싶냐는 영의 질문에 냉큼 전세금 이야기를 꺼냈다.
집 계약 날은 아침부터 바빴다. 늘보와 나는 자전거를 타고 부동산에 도착해 영을 기다렸다. 의외로 혼자 어정쩡하게 부동산에 들어온 사람은 아빠였다. 임대인은 자연스럽게 그를 “친정아버지”라고 칭했고 늘보와 나는 굳이 호칭을 정정하지 않은 채 불편하게 그와 조우했다. 늘보와 아빠는 초면이었다. 나로서는 얼추 일 년 만에 그의 얼굴을 마주한 셈이었다.
아빠는 어색하게 부동산을 서성이더니 나와 중개인 옆에 주춤거리며 앉았다. 익숙한 맨솔 샴푸 냄새가 풍겼다. 갑갑하고 허했다. 돈을 빌릴 때가 아니라면 그가 필요하지 않게 된 순간이 언제부터였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이 금액이 맞죠?" 확인하고는 순식간에 돈을 입금했다. 옆에 앉은 그를 의식하며 앞을 응시했다.
영은 차 안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부동산은 “아빠가 전문”이라며 한 발 물러 서길 여러 번이었다. 나와 아빠의 대화를 유도하려고 안간힘 쓰는 게 보였다. 부동산 조언을 잘해주다가도 뜬금없이, “아빠한테 물어봐” 혹은 “전세금 아빠가 대 주는 거야” 하며 꼭 그의 지분을 챙겼다.
계약이 끝나고 함께 근처 닭갈비 집에서 밥을 먹었다. 방역수칙으로 합석이 불가했기에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늘보는 좌불안석이었고 나는 영이 신경 쓰였다. 식사가 채 끝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와 계산을 했다. 기억해보니 한 번도 내 돈으로 밥을 사본 기억이 없었다.
인원 제한 때문에 카페를 갈 수 없어 집으로 초대했다. 등산로를 지나 좁은 주택 단지 사이로 영의 차가 들어왔다. 집 앞 주차장은 SUV가 들어가기 불가능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산 밑 턱에 차를 세워두고 내렸다. 달뜬 늘보와 헉헉대는 영, 조용한 아빠가 말없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아빠는 묵주를 짤랑이며 걸었다.
늘보가 가쁘게 몸을 움직였다. 커피콩을 갈고 빵을 굽고 물을 끓였다. 거실 겸 침대 방에 둘러앉은 우리는 바지런한 늘보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좇았다. 정신없는 틈에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방 한가운데로 겨울 볕이 내렸다. 식탁을 들어 양지로 자리를 옮겼다.
수증기 속 물방울이 빛에 반사돼 눈이 부셨다. 영과 늘보는 살갑게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얼핏 나를 통해 서로의 캐릭터를 짐작했었다고 허허, 깔깔 웃었다. 나는 창 밖을 주시하고 아빠는 홀짝홀짝 커피를 마셨다. <24시 대중사우나>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았다. 영은 아빠를 쳐다보고는 팔을 툭툭, 밀었다. 당신 여기 엄청 오고 싶어 했잖아, 뭐라고 말 좀 해봐.
못 본 사이에 눈이 처져 무쌍 눈에 쌍꺼풀이 생긴 것 같았다. 흰머리들이 반짝였다. 그는 내 어깨너머를 내다봤다. 난 계속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마른 목을 가다듬었다. 준비해온 말을 전하듯, 차근차근 단어를 뱉었다. 그래, 엄마 말처럼, 그동안은 내가 너한테... 갑질 같은 걸 했어.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얇고 높은 목소리가 긴장으로 진동했다. 아빠는 집을 한 바퀴 스캔하고 이삿날 필요하면 또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가방을 챙기던 영은 어색하게 빠져나가는 그를 뒤로하고 웃어 보였다. 또 올게. 잘 있어. 영은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손을 흔들었다.
밥이 질었다. 꼭 죽 같았다. 혼자 이것저것 반찬통을 열어보느라 복작거리는 와중에도 영은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에이, 당일 취소는 안 되는 데. 하늘색 뿔테 안경을 벗으며 영이 고개를 들었다. 수업이 취소가 된 모양이었다.
영은 퍽 오랫동안 어린이들을 만나왔다. 20대 내내 피아노를 가르치더니 돌연 대기업 학습지 회사에 입사해 특수고용 노동자로 일했다. 퇴사 후에도 어린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은 교사인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오늘 수업이 우리 집 근처라 겸사겸사 같이 점심을 먹자는 취지였는데 오후가 통째로 비어버렸단다. 이럴 거면 음식점을 갈 걸. 허접하게 무친 반찬 두어 개를 조금씩 담아냈다.
제육볶음은 비렸다. 고기가 생각보다 오래된 것 같았다. 핸드폰에 집중하느라 영은 어차피 신경도 안 쓰는 듯했지만.
“엄마, 오후 시간 비었으면 둘이 드라이브나 갈까?”
“엥, 아빠 오늘 일찍 들어온 데서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먹을래?”
아, 아빠는 싫은데.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흥, 넌 정말 어려워.”
우리의 포지션은 어쩔 수 없었다. 잠자코 밥을 먹으려는 영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간질였다. 어이없어 웃던 영이 하지 말라고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