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의미 Mar 26. 2022

헤이, 소울 시스터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어.”


자매가 있는 친구들이 언니와 비슷한 옷을 돌려 입거나 같이 영화를 보거나 스스럼없이 연애 얘기를 하는 게 부러웠다. 옆에 누워있던 영이 몸을 뒤집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럼 날 언니라고 생각하면 되지.”

 

눈썹 문신이 씰룩거렸다. 확실히 영은 다른 엄마들에 비해 어렸다. 그럼에도 날 낳아준 여자와 친구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둑한 조명 밑, 비어 가는 맥주잔 앞에서 나는 그간 숨겨왔던 나의 연애사를 영에게 간명하게 읊었다. 장담컨대 완벽하게 우발적인 고백이었다. 본인이 쿨한 언니/엄마라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영은 기꺼이 집 근처 호프집으로 날 이끌었다.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영은 교묘하게 궁금했던 정보를 캐물어왔다.

 

"너 연애해봤지."

"당연하지."

"몇 번?"

"두 번?"

"내가 아는 애야?"

"그럴 리가. 완전 비밀이었지."


영의 경우 대학 때 사귄 사람과 결혼을 하는 바람에 재미있는 연애사가 하나도 없었다. 모부의 연애를 자세히 알고 싶진 않았으므로 그냥 내 얘기를 했다. 말하면서 내심 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지금 언니 일지 엄마 일지 궁금했다. 난 필터링 없이 말했다. 지나치게 솔직한 바람에 듣는 사람이 종종 부담스러워했다. 다행히 영은 굿 리스너였다. 말로 벌어먹고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 같았다.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어디까지 가봤는데?"

"섹스를 말하는 거야?"

"음..."


말없이 술을 마시는 것으로 그녀는 불편함을 표현했다. 그래도 부정적 평가랄지 성급한 조언은 없었다. 몇 번의 질의응답 끝에 골똘한 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우리 딸이 이런 얘기 앞으로도 엄마랑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맥주잔을 짠, 부딪혔다. 느지막한 밤, 한층 쌀쌀해진 초가을 바람에 영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비비며 달렸다. 키가 작은 영 때문에 달리는 꼴이 엉거주춤했다.  



대학을 가고 나선 줄곧 밖에서 지냈다. 학교 기숙사와 원룸을 전전했고 가끔 닭장 안 닭처럼 답답함이 몰려오면 집에 들렀다. 주로는 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애주가 영의 집에는 항상 와인과 수제 맥주가 구비되어 있었는데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술이 나왔다. 처음 보는 종류에 눈이 번쩍 뜨이면서, 어떻게 술을 공수해오는지 놀라곤 했다. 영이 술상을 깔고 아늑한 램프를 켜고 에어 프라이기로 맛있는 음식을 조리하면 막혔던 변기가 뚫리듯 쌓였던 말들이 쓸려 나오곤 했다. 욕설이 난무하고 과장된 일반화가 할당량을 넘으면 난 그제야 좀 진정이 되었다. 극악무도 잔인했던 세상이 그나마 좀 살만해졌다. 마지막 마무리는 항상 오징어, 마요네즈, 맥주였다.


물론 영과의 교류가 늘 좋진 않았다. 대판 싸운 적도 많았는데 섹스와 피임에 있어선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영은 양가적이었다. 어떤 날은 나와 잔 독일 남자애의 구체적인 애무 방법을 궁금해하면서도 어떤 날은 듣기 싫다며 섹스가 뭐가 재밌냐고 반문했다. 섹스가 재미없다고?! 나는 영에게 분노와 측은지심을 동시에 느꼈다.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섹스가 재미없다니. 그리고 연애하면서 섹스를 안 하는 게 말이 돼?”

“왜 말이 안 돼. 싫다고 하면 되잖아!”

“좋은데 어떻게 거짓말을 해? 엄마랑 아빠는 퍽이나 그랬겠다. (그들의 결혼기념일과 내 생일은 계산상 너무 가까웠다)”

“......”


목청껏 영과 내가 싸울 때면 우리 집 남자들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열기는 쉽게 가시질 않았다. 싸움이 끝나고도 여진(餘震)처럼 서로를 향해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럼에도 나의 최신 근황과 고민, 비밀은 속속들이 영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내가 영에게 말하지 않고는  배겼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영은 본인의 불안함을 나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체념한 거냐고 질문하니 영은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막아도 말릴  없을뿐더러 곧이곧대로 엄마 말을 잘 듣는 자식을 만들기는 싫댔다. 나 역시도 어느 날은 적당한 거리감이 갈등의 해결책인가 싶다가도 또다시 영이 지나치게 초롱초롱하고 애정 담뿍 묻은 눈길로 비밀을 물어오면 결심은 단숨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거리를 두려고 하지 말고 나한테 언질을 주면 되잖아." 영이 어느 날은 차분하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나한테도 변화를 감지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어른이 된 자식은 네가 처음이란 말이야." 술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도 목소리가 또렷이 와닿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서 자꾸 눈을 비볐다.


집을 나온 후 오랜만에 영의 얼굴을 마주했을 땐 그녀도 침착한 얼굴을 띠고 있었다. 어떤 결론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주말 낮 월남쌈 샤부샤부 뷔페는 그런 점에서 세상 진지한 우리의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마스크를 쓴 어린이들이 뛰어다녔고 그들을 잡기 위한 분주한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아 다행이었다. 육수를 리필하고 뜨거운 물을 옮겨 나르는 동안은 어색하게 마주 볼 필요가 없었다. 국물이 우동 사리와 수제비에 질척 질척 들러붙을 때까지 우린 먹고 또 먹었다. 배가 부르다는 말을 굳이 하기 싫어서 찐득한 국물을 사발로 들이켜고 볶음밥을 또 시켰다. 눌은밥을 뒤적이며 미뤄뒀던 이야기를 끝끝내 미뤘다. 

집 근처까지 와준 영에게 유명한 빵집 마들렌을 주었다. 영은 맛있는 와인을 사두었다며 마음이 내킬 때 집에 들르라는 말을 툭 던졌다.

이전 02화 테이크 미 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