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는 반찬통 하나 건너 맥주였다. 도쿄 올림픽 여자 배구 준결승전이었다. 영과 호롱, 도롱은 맥주를 다발로 챙겨 거실로 옮겼다. 해가 지자 철판처럼 뜨거웠던 마루 바닥이 빠르게 식었다. 커튼이 바람에 푸덕 푸덕 움찔거렸다. 습기 밴 몸이 빠르게 식었다.
나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헷갈렸다. 인상으로 단어를 받아들이곤 했다. 시끌벅적한 경기들은 하나같이 똑같이 느껴졌다. (직접 뛰는 경기는 제외한다) 연신 맥주를 들이키며 소리를 지르는 저들은 나와는 다른 종족이었다. 구기 종목들을 과도하게 애정 했으며 특히 야구에 있어서는 언제나 현장에서 함께하길 희망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 그 에너지를 무심코 감탄하곤 했다.
탄식을 내뱉는 쪽은 주로 영이었다. 미련에 있어선 그녀가 선두였다. 아들들이 모두 두산 베어스의 팬임에도 굳건히 40년째 기아 타이거즈의 팬을 자처했으며 진지하게 광주로의 이사를 고민했다. 주말마다 기아의 홈경기를 보는 게 아무래도 최고의 노후일 것 같다는 결론이었다. 일과의 끝은 늘 야구경기와 맥주 한 캔이었고 팀의 실적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지지부진할 때도 꼭 하이라이트는 돌려봤다.
위협적인 공이 네트 위를 날아다니다 바닥으로 내려 꽂혔다. 브라질의 서브만으로도 한국은 점수를 잃었다. 운동화 마찰음으로 조용한 경기장, 이내 장내를 메우는 굉음과 탄성, 땀으로 범벅된 유니폼, 텅 빈 관객석이 그대로 화면으로 송출되었다.
“에이, 씨.” 영은 목이 타는지 벌컥벌컥 캔을 들이켰다. 1세트가 꽤나 큰 점수 차이로 마무리된 시점에서 호롱은 슬쩍 방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방에서 컴퓨터가 도는 소리가 들렸다. 도롱은 호롱과 영이 먹은 맥주까지 깨끗이 치웠다. "아윽, 아아아!!" 사자후를 토하는 영을 옆에 두고 살뜰히 맥주를 채우고 쥐포를 굽고 소스를 리필했다. 서빙을 하는 브라질이 3점을 올리면 한국이 1점을 따라왔다. 간격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으나 더 벌어 지지도 않았다. 영의 등은 소파에 붙을 줄 몰랐다. 단비 같은 득점의 환희를 위해 기를 모으듯 실점을 똑똑히 목격했다. 3세트를 모두 지고 나서야 영은 기지개를 켰다. “아쉽다. 브라질이 너무 잘하네.” 노가리를 굽던 도롱이 부엌 밖으로 나왔다.
귀뚜라미 소리가 찌륵찌륵 창을 타고 넘었다. 입추랬나. 시원하고 건조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영은 창과 가장 가까운 소파에 누워 바람을 쐤다. 쒝, 쒝 낮은 숨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풀벌레 소리 틈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발치에 앉아 창밖을 쳐다봤다. 가로등이 유리에 비쳐 아른아른 흔들거렸다.
“엄마,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그럼.”
“… 내일모레도 자고 가도 돼? 시원해서 집에 가기 싫네”
“자고 싶은 만큼 자고 가.”
소파에 놓인 영의 두꺼운 발목을 잡아 내 허벅지 위에 올렸다. 내가 유일하게 영을 닮은 구석이었다. 발 매무새가 꼭 퉁퉁하고 묵직한 알타리 무를 연상케 했다. 영은 월광 소나타를 틀었다. 가을로 가라앉고 있었다.
밤 열한 시가 넘긴 시각에서야 아빠가 돌아왔다. 그와는 여전히 어색했으므로 대면대면 맞았다. "오늘은 자고 가요." 그는 피곤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아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영이 갑작스레 벌떡 일어났다. 곧장 아빠에게로 가더니 오른팔에 감각이 없다 했다. 축 뻗친 오른팔을 왼손으로 주무르는 영의 모습이 괜스레 이상하고 웃겼다. “에이 잘못 누워 잤겠지. 오래 베고 자서 피가 안 통하는 거 아니야?” 아빠와 나는 번갈아가며 있음 직한 시나리오를 하나씩 읊었다. 말랑말랑한 오른손 팔뚝을 만지고 또 만지면서. 너털웃음을 짓다 심각했다 코웃음 치던 영이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 진짜 이상하다고! 팔에 감각이 없다고!”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구급차를 불렀다.
영의 말이 느려졌다. 발음하는 자음과 모음의 경계가 흐릿했다. 풀린 입술 사이로 침이 천천히 떨어졌다. 잠에서 깬 호롱, 도롱이 당황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엄마가 이상해." 옷을 갈아입으려 일어서니 영의 몸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울다 지친 엄마를 호롱, 도롱이 부축하고 그 틈에 내가 상의 탈의를 시도했다. 정신이 없는 틈에도 영은 옷을 꽉 부여잡았다. 눈에 띄게 몸이 굳고 있었다. 환복을 끝내지도 못한 채 영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정신 차리세요. 잠드시면 안 돼요. 메아리 같은 구급대원들의 목소리들이 복도에 울렸다.
호롱, 도롱과 맞대고 앉아 아빠의 전화를 기다렸다. "사지마비", "안면마비", "두통", "손 마비", "오른손 마비"를 닥치는 대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병명, 증상, 예방, 치료법이 쏟아졌다. 블로그는 하나같이 빠른 시일 내 병원 방문을 권장했다. 두 시간 전에 엄마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혀가 얼마나 빨리 굳었는지를 떠올리다가 자꾸 나른하고 몽롱했다. 메케한 연기를 별수 없이 꿀떡, 꿀떡 받아먹는 것 같았다. 속이 메스꺼워 잠시 고개를 돌리니 동생들도 핸드폰 액정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곧 도롱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운 것 같았다.
“뇌출혈이래.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한대. 안 그러면…”
급하게 벗은 잠옷은 소파 팔걸이에 위태롭게 걸려있었다. 붕괴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잔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