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첫 번째 여자는 트로트 가수 임영웅의 일거수일투족을 쫒았다. 저녁을 먹고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어김없이 그의 근황을 업데이트했다.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은 본인들이 임영웅의 모든 정보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자부했다. 기계음 같은 설명에 맞춰 그녀는 코를 골았다.
두 번째 여자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다. 유일하게 방에서 나와 나이대가 비슷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밤마다 “유카짱”이란 사람과 오랫동안 통화를 했으며 줌으로 고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커튼을 타고 넘어왔다. 이해가 되는 말들과 그렇지 못한 단어들이 줄곧 섞였다.
세 번째 여자는 예비 바리스타였다. 오랜 기간 숙원 하던 자격증이었다. 자격증을 딴 이후에는 본인이 차린 카페에서 사업을 시작하려 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주말마다 자전거 동호회원들과 자전거를 탔다. 실력이 좋아지면 산악 바이크도 도전해보려 했다. 지금이야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간이침대에 누우면 그녀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소리뿐일까. 뒤척임, 잠꼬대, 한숨, 푸념, 목 넘김이 전부 넘어왔다. 나와 그녀들의 거리는 고작 한 뼘이었다.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고 거리까지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들의 의식주가 시시각각 중계되었다. 병실에 불이 꺼지면 옆모습 실루엣이 내 머리 위로 그려졌다. 그림자를 따라 그녀들의 얼굴을 상상했다. 자주는 내가 먼저 말을 거는 모습이 그려졌다.
첫 번째 여자는 궁금한 게 많았다.
“여기가 몇 번째 병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몇 초간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검버섯 핀 볼 위로 호기심 깃든 눈이 나를 쳐다봤다. 최근에 파마를 한 나보다 더 빠글빠글한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타 대학병원에서 여기로 옮겨왔다고 했다. 다른 병원에서 오진을 내려 고생하다가 뇌종양이라고 밝혀진 덩어리가 커져버렸다고. 불시에 튀어나오는 이북 사투리가 귀에 착착 감겼다. 중국에서 온 간병인들과는 자연스럽게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당연히 중국이 고향일 거라 생각해왔다. 현 거주지는 순천으로 아들과 며느리가 동거인이라 했다.
두 번째 여자는 사과를 건네 왔다. 본인이 먹던 밀크티를 쏟은 것이었다. 우유병은 땡그르, 간이침대 밑으로 굴러왔다. 우유가 콸콸 쏟아졌다. “어머, 죄송해요. 어떡하지.”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는 내가 휴지를 가져오는 동안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주워들었던 말에 따르면 중국에서 마운틴 클라이밍을 하다가 떨어져 척추가 부러졌다. 한 달 전쯤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코로나 때문에 자가격리를 오래 한 것 같았다. 요점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주섬주섬 일어나려 애를 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잽싸게 일어나 휴지를 잔뜩 뽑아 바닥에 흩뿌렸다. 그 시각 영은 피검사를 하느라 커다란 주삿바늘과 시름하는 중이었다. 양 옆에서 시름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는 연거푸 사과를 건넸다. “진짜 죄송해요. 제 휴지 쓰세요. 제가 닦아야 하는데.” 가지런한 처피 뱅만큼 고른 흑단발 여자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진한 쌍꺼풀 눈이 제일 먼저 보였다. 장엄한 중국 산에서 아찔하게 마운틴 클라이밍을 하던 대담한 언니가 스쳤다. 대충 괜찮다고 둘러대다가 진심으로 괜찮아진 순간이었다. 그녀는 미안해하며 탄산 음료수 두 개를 건네고는 다시 커튼 닫혔다. 그녀의 미안함을 빌미로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영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루가 꽉 찼다.
세 번째 여자와는 아직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다만 가장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전화 너머로 그녀는 하루 종일 자신의 근황과 심정을 고백했다. “나, 교통사고 당했어. 트럭이랑 자전거를 타다가 부딪혔다니까, 나만. 진짜 웃긴 건 뭔지 알아? 비싼 돈 주고 산 헬멧을 멀쩡하고 내 머리만 깨진 거 있지. 소송 걸어야 할까 봐.” 주로 의사의 사람됨과 그의 진단에 대해, 사소한 말버릇 까지도 의심했다.
병원에서 편안한 잠을 자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같이 그 여자들 때문이었다. 첫 번째 여자는 요란한 코골이였다. 간헐적으로 요란해서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잠에 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두 번째 여자는 여느 청년들처럼 밤새 분주했다. 밀린 드라마를 몰아보고, 글을 쓰고, 노래를 들었다. 불빛 때문에 눈이 아파왔다. 세 번째 여자는 신음소리로 나를 자주 깨웠다. 타박상으로 인한 통증이 잦게 몰려오는 듯했다. 열이 올랐을 때 내가 내는 소리와 아주 유사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쑤셨다. 목과 척추가 함께 저렸다. 속으로 종종 그녀들에 대한 저주를 퍼붇다가도 갑작스러운 정적에, 뒤척임에, 깊은 한숨에 심장이 콩콩콩 내려앉았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여자는 차례대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 여자는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안부인사를 나누고, 건강을 빌고, 배웅을 받으며 떠났고, 두 번째 여자는 수술 일정에 맞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라졌고 세 번째 여자는 다음 주에 퇴원 예정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여자들이 머물렀다 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엄마 영과 내가 언제 떠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