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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킵 고잉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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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미 Mar 06. 2022

텔 미 무얼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듯 기차는 쉼 없이 앞뒤로 달그락거렸다. 완은 불편한 듯 기차 벽 쪽으로 뉘었던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옆 침대로 잠든 휘의 얼굴이 보였다. 오랫동안 뒤척이다 잠이 든 듯했다. 스쳐 지나가는 불빛이 언뜻언뜻 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림자는 길어졌다가 짧아지고를 반복했다. 아까는 그렇게 씩씩해만 보이더니. 완은 휘를 응시했다. 오므려진 휘의 다리는 상체 쪽으로 힘겹게 당겨져 있었다. 완은 어쩐지 잔뜩 수그린 휘의 어깨가 더욱 그녀를 쪼그라들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휘는 마치 햇볕에 바짝 말린 새우 같았다. 이렇게 앞으로 숙이고 또 숙이다가 그대로 자연 발화해버릴 것만 같았다.


완은 옆으로 누웠던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덜커덩덜커덩. 겨우겨우 들었던 선잠이 깨고 나선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온종일 굶고 기차를 타서 생긴 일시적인 멀미라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계속 같은 장면이 생각났다. 장면들은 횟수를 거듭하면 할수록 섬세하게 선명해져서는 마치 방금까지도 이르쿠츠크 기차역에, 쾌쾌한 말보로 레드 냄새가 짙게 베여있던 BMW 안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완은 옆에서 비명을 지르던 휘와 그 모습을 재밌듯 쳐다보며 어쭙잖게 말을 붙였던 남자들에게로 자꾸만 돌아가고 있었다.


눈을 뜬 완은 등 뒤에 베개를 대고 상체를 약간 세워 다시 자세를 잡았다. 천장이 낮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삼등석 2층 침대칸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자세였다. 베개와 벽 사이에 끼어 있던 핸드폰이 보였다. 새벽 세시 반. 정신이 더욱더 또렷해졌다. 아래 칸 할머니들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내가 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논리 정연하게 나를 설득하던 휘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신중하게 역무원에게 다시 한번 물어봤더라면. 내가 그 남자들의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역에 촉박하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만만하고 얼빠지게 보이지 않았더라면. 늦게 도착했어도 그 남자들의 말을 씹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완은 장면들을 곱씹었다. 침대를 일정하게 흔들던 기차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역사를 흐릿하게 밝히는 불빛에 창가에 누워있는 휘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휘의 눈가 위로 눈물 자국이 눌어붙어있었다. 침대 시트는 아슬아슬하게 휘의 다리 사이에 걸려있었다. 꿈자리가 사나울 만도 했다. 완은 주위를 둘러보며 침대 밖에 걸쳐져 있는 시트를 휘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조용해진 복도 사이로 사람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창문 밖으로 ‘톰스크’ 글자가 보였다.


복도 끝에서부터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분명 운동화는 아니었다. 구두이거나 워커임이 확실했다. 완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분명 자기 앞에서 멈출 것이었다. 실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당신이 안지완입니까?

네? 네.

같이 갑시다.


낮에 말을 걸었던 승무원과는 다른 사람이 완을 불러냈다. 워낙 음색이 낮아 자고 있었더라면 한 번에 못 알아들었을 법했다. 그는 침대 바로 옆에 서서 완을 기다렸다. 어서 챙길 것은 챙기고 본인을 따라오라는 것으로 완은 이해했다.


작은 움직임에도 휘는 자주 화들짝 놀랐다. 승무원의 목소리에 깬 모양이었다. 휘는 얼마 자지 못해 찡그린 눈으로 완을 쳐다봤다. 어물쩍한 자세로 여권과 핸드폰을 보조 가방에 넣던 완은 휘에게 깨워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왜. 경찰이래? 휘가 빠르게 물었다. 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가. 몸을 어정쩡하게 세워 앉더니 여권과 핸드폰을 하나둘 챙기기 시작했다.


승객들이 타고 내리는 계단 바로 옆엔 밤샘 근무를 하는 횡단 열차 승무원들을 위한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다. 직원들은 간이의자에 앉아 목이 말라 잠에서 깬 승객들에게 물을 팔고, 주기적으로 연착 시간을 기록하는 서류를 작성하고, 새벽에 탑승한 승객들의 표를 확인하고, 침대 시트를 건네주고, 자리 알려주는 일을 했다.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공간에 이미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간이 책상 위 경찰모를 놓아두고 사건 조사서를 작성하고 있는 여자가 담당 경찰이었다. 옆엔 조수로 보이는 땅딸막한 남자가 양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승무원복을 입고 있던 금발 머리 여자는 복도를 걸어오고 있는 휘와 완, 그리고 완을 깨운 승무원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터널을 지나듯 완과 휘는 승무원을 따라 복도 끝을 향해 걸었다.


여권을 받아 든 경찰은 완과 휘의 이름을 조사지에 적었다. 남한이라. 남한. 분명 조용히 읊조리는 것일 테지만 공간이 워낙 비좁아 그 공간에 서 있는 모두가 그녀의 혼잣말을 공유했다. 필요한 정보를 모두 기재한 경찰은 난처한 듯 완과 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흠. 누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요? 막막한 표정이었다. 난처하긴 완과 휘도 마찬가지였다. 휘는 완을 쳐다봤다. 제가 러시아어를 조금 할 줄 알아요. 완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이르쿠츠크에서 도난을 당한 거죠?

그건 아니고 안가라 역에.

그 남자들을 만난 건 이르쿠츠크 역이에요?

두 남자 말하다, 기차 떠났다. 택시 기사. 우리 데려다준다고 말했다.

남자 둘이 택시기사인 척하고 기차가 떠났다는 얘기를 했다는 거죠? 그럼 안가라 역에 도착하고 나선 어떻게 되었어요?

두 남자, 차 잠갔다. 창문에. 살려주세요. 창문도 잠갔다. 돈 내놔, 돈 내놔.


경찰은 완의 대답을 끝까지 기다렸다. 러시아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더니 경찰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단어를 더듬는 완에게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은 반복해서 완의 눈을 마주치면서도 손으론 빠르게 진술서를 작성해나갔다. 무질서한 단어들의 단순 조합이 순식간에 정갈한 문장으로 바뀌었다. 옆에서 손짓으로 완의 단어를 보충하던 휘가 신기하듯 채워지는 진술서를 흘깃거렸다.


혹시 차 번호는 기억해요? 거침없이 글씨를 써 내려가던 손이 잠시 멈칫거렸다. 경찰은 완을 올려다봤다. 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휘를 쳐다봤다. 차 번호 기억해? 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 거구나. 휘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랬던 건가 봐. 완이 대꾸했다. 정적이 흘렀다. 경찰은 완과 휘의 눈치를 살피더니 볼펜을 탁탁 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남자들은 어떻게 생겼어요? 옷차림이나, 인종이나, 머리 색깔 같은 거요.


‘생김새? 인종?’


완은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번역기를 틀었다. 하지만 기차는 역을 떠난 지 오래였다. 움직이는 기차 안에선 인터넷 연결이 불가했다.


경찰은 본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자신의 얼굴을 두드렸다. 이거요. 이거. 완은 아하, 검지를 치켜세웠다. 지켜보던 승무원이 킥킥댔다. 경찰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 명은 금발, 슬라브인이었고요, 키가 컸어요. 맞지? 완이 휘를 돌아봤다. 응응.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좀 더 작고 귓불이 넓었던 것 같고 약간 짱구를 닮았어. 휘는 보조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더니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얼굴은 어떻게 생겼어요? 경찰이 본인의 눈, 코, 입을 차례로 가리켰다.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완은 볼을 긁적였다. 다 크고 음······. 휘가 완에게 수첩을 펼쳐 보였다. 영락없는 송충이 눈썹 짱구였다. 부랴트인이에요? 경찰이 그림을 보더니 물었다. 부랴트인은 몽골어계 민족이었다. 아니에요. 재빨리 휘가 대답했다. 베개로 쓰기에도 두꺼운 《유라시아 견문록》 책을 배낭 안에 챙겨 온 그녀였다. 부랴트가 만두 이름이었던가를 생각하던 완은 혼자 머쓱했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경찰은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서명을 요청했다. 스바시바. 완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엄청 심각한 일인데 너희가 더 고생했지. ‘심각하다’는 단어만 알아들은 완이였지만 나머지는 제멋대로 의역해도 좋지 싶었다. 오랜만에 믿을 사람이 생긴 기분이었다. 10분간 정차한 간이역에서 경찰과 조수가 나란히 내렸다. 완과 휘는 괜히 그녀가 내린 문 근처를 기웃대고 있었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침대로 다시 돌아왔을 땐 여섯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목소리가 낮은 까까머리의 승무원은 완과 휘가 침대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내일도 경찰이 올 거예요. 아까 완을 깨웠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그가 말했다. 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등을 침대에 붙인 휘는 완 쪽으로 고갤 돌려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보던 완이 휘의 기척을 느끼고는 휘와 눈을 맞췄다. 진짜 하루 길다, 좆같이. 완이 말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타고 진하게 우린 얼그레이 향이 풍겼다. 완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휘의 방향으로 돌려 눕자마자 부푼 솜사탕 같은 할머니 머리카락이 보였다. 휘의 침대 아래 칸 할머니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유심히 쳐다봤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더라. 완이 눈을 꿈뻑였다. 생각해보니 물어본 적이 없었다. 기차를 타자마자 우는 휘를 달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나서는 여기저기 도움을 청했다. 아침 햇살이 기차 창문으로 비스듬히 내렸다. 차 연기가 몽실몽실 아지랑이 피며 올라왔다. 완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물론 목을 제대로 가누진 못했다.


횡단 열차를 일찍 예매하는 부지런한 여행객들은 보통 위, 아래 침대를 한꺼번에 예약했다. 이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위 칸 침대에서는 앉아있질 못하니 낮잠이나 밤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앉아있을 수 있는 아래 칸 자리가 절실해지기 마련이니까. 열차 생활의 필수 제반 조건인 것을. 완은 새삼 한 달 전을 회상했다. 호기롭게 본인의 유학지인 모스크바를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가겠다고 선언하고 여행을 계획하던 중 여행 짝꿍이던 친구가 돌연 동행을 취소했다. 완은 곧바로 휘에게 연락을 걸었다. 언젠가 휘에게 같이 바이칼 호수에 가보자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휘라면 기꺼이 동행자가 되어줄 것 같았다. 완은 끊임없이 휘를 설득했다.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동행자가 있다면 얼마나 여행이 편하겠니. 바이칼 담수에 몸을 담그면 얼마나 시원하겠니. 나랑 별 보고 누워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다. 결국 늦게 기차를 예매했다. 남아있는 자리가 모두 2층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내려와서 같이 앉자. 나타샤가 말했다. 나타샤는 완의 아래 칸 침대를 쓰는 할머니였다. 어제 울면서 침대 시트를 꺼내는 휘를 궁금하고 걱정되는 눈으로 쳐다봤었다. 완이 기차에 타자마자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나타샤는 러시아어로 휘가 우는 이유를 설명하던 완을 신기해했다. 나타샤의 숏 컷 금발머리가 창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완은 낑낑대며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건너편 할머니를 멍하니 쳐다보던 완은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어제 산 과일차 티백을 끓는 물에 담갔다. 할머니들을 따라 창문을 보며 차를 홀짝이고 싶었다. 손이 따뜻해졌다.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던 나타샤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가방에서 오이, 통밀빵, 토마토, 치즈가 차례로 나왔다. 완은 새삼 배를 눌러보았다. 본인도 배가 고픈 것 같았다. 엄마, 이거 먹어요. 나타샤가 통밀빵에 치즈와 토마토를 얹어 건너편 할머니에게 건넸다. 나타샤가 내민 빵을 잠자코 받아 든 할머니는 천천히 입을 오물거렸다. 차 한 모금 마시고 창문 한 번 보고 빵 한 입 베어 물고 또다시 창문 한 번 봤다.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평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파란 하늘 드리운 푸른 평원이었다. 간혹 듬성듬성 잎사귀를 모두 떨군 나무도 스쳐 지나갔다.


침대에서 내려온 휘는 미안하고 어색해하며 완 옆에 앉았다. 잘 잤어? 완이 물었다. 휘는 고개만 끄덕였다. 배고파. 꼬박 네 끼를 흘려보낸 다음에서야 배가 고팠다. 아무 말 없이 창문만 보던 할머니가 휘를 쳐다보더니 자기 자리 옆을 톡톡 쳤다. 셋이 앉기는 침대가 좁으니 본인 침대로 오라는 것 같았다.


나타샤는 아르야를 살뜰히 챙겼다. 아르야가 말하지 않아도 오이를 씻고 토마토를 썰고 차를 우렸다. 엄마 할머니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완은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박수를 쳤다. 처음 들어본 러시아 이름이에요. 요정 이름 같아요. 일흔네 살 아르야는 부끄러운 듯 미소 짓더니 또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르야의 시선이 거둬질 때마다 한 모금씩 차를 홀짝이다 보면 차를 따뜻하게 다 마실 수 있었다. 본인들은 몰랐지만 완과 휘는 아르야의 모든 행동을 유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나타샤와 아르야는 예카테린부르크에 사는 딸을 보러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나타샤에겐 딸, 아르야 할머니한테는 손녀딸. 나타샤가 대답했다. 지금은 이르쿠츠크에 살고 있지만, 원래는 가족이 다 같이 예카테린부르크에 살았다 했다. 완과 휘는 순간적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만약에 예정대로 이르쿠츠크에서 기차를 탔더라면 울면서 할머니들과 첫 대면을 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르쿠츠크로는 언제 이사 가신 거예요? 완이 나타샤가 건넨 오이를 베어 물었다. 한 20년 되었지? 결혼하고 지금 예카테린부르크에 사는 딸을 낳고 이사 갔어. 예카테린부르크가 크고 일자리도 많고 대학도 있어서 좋긴 한데 애들 키우기는 영 별로인 거야. 자연이 좋지. 바이칼도 좋고. 너희들 바이칼에는 갔었니? 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지 못한 휘는 완과 나타샤의 반응을 살폈다. 우리 바이칼 갔었냐고. 완이 재빠르게 번역했다. 아아, 네네. 휘가 환하게 웃었다. 나타샤가 귀엽다는 듯 덩달아 웃었다. 삶은 계란을 까던 나타샤가 돌연 걱정스러운 얼굴로 완을 응시했다. 어제 경찰이 새벽에 온 것 같던데 조사는 잘 받은 거니? 다 괜찮은 거지?


기차 출발 시각은 오후 세 시 45분이었다.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완과 휘는 아주 느긋했다. 아침에 갓 구운 블리니를 먹으며 어제 바이칼 담수 너머로 지던 해를, 지는 해를 보며 먹었던 맥주를, 맥주를 먹고 나서 어둑해질 무렵 샤먼 기둥 옆에서 췄던 춤을 떠올렸다. 조식을 먹고 짐을 싸서 아홉 시에 체크아웃을 하면 열 시 버스로 이르쿠츠크 중앙역에 도착할 터였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했던 게 화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버스 매표소가 갔으나 공공버스는 이미 떠났다고 했다. 어제 시간만 알아보고 예약을 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주변에 있는 간이 버스 정류장에 모두 들러 다른 사설 버스는 없는지 물었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 기차역으로부터 250km 떨어진 알혼 섬에서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세 시간 반이 필요했다. 열한 시엔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12킬로에 육박한 배낭을 진 휘와 사방이 돌이라 캐리어를 들춰 맨 완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신중하지만 느린 휘와 빠르지만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완이 오랜만에 의견을 모았다. 일단 묶던 숙소를 향해 달렸다. 땀이 겨드랑이, 등, 목덜미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눈에서도 덩달아 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숙소에 먼저 도착한 완이 기차표를 들이밀며 제발 살려달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직원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사설 버스를 예약해주었다. 뒤이어 도착한 휘가 완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직원이 진정하라며 물을 건넸다.


버스가 섬 입구에 도착해 배에 실려 섬 밖으로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려 역에 도착할 때까지. 완과 휘는 본인들을 두고 떠나는 열차와 허망하게 열차 뒤꽁무니를 쫓는 상상을 접을 수가 없었다. 5분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분이 아까운데 같은 버스를 탄 동행자들은 더디기도 참 더뎠다. 다행히 20분을 남기고 역에 도착했다. 완과 휘는 안도 했다. 열차를 타기 전 마트에 들리자던 약속도 지킬 수 있었다.


열차가 지연된 모양이었다. 역사 안에 걸린 열차 시간표가 완과 휘의 기차표보다 10분이 더 늦었다. 완과 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다리면 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완에게 말을 걸었다. 너 모스크바 가려는 거지? 그 기차 이미 떠났어. 봐봐. 지금 역에 기차 없잖아. 가까스로 진정된 완의 심장이 다시 요란하게 쿵쿵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닐 텐데. 완은 기차표와 시간표를 번갈아 훑었다. 휘는 옆에서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키가 작고 눈썹이 진한 남자 하나가 더 다가왔다. 맞아. 기차는 떠났어. 지금 빨리 다음 역으로 가지 않으면 기차 놓칠걸. 완의 눈이 떨렸다. 마른 남자는 보란 듯이 완의 캐리어를 끌고 개찰구를 향해 손짓했다. 와서 봐봐. 기차가 없다니까. 뛰어가는 그의 등 뒤로 완이 소리를 질렀다. 근데 왜 넌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완의 캐리어는 이미 차 트렁크에 실려 있었다. 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완아. 그냥 기다리면 기차가 올 텐데 먼저 떠났다는 게 말이나 돼? 차 문이 닫혔다. 마른 남자와 눈썹 진한 남자가 차례로 앞에 올라탔다. 우리가 빨리 데려다줄게.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차는 시속 150km로 질주했다. 불안정하게 핸들을 잡은 진한 눈썹의 남자는 1차선 도로서 중앙선을 침범해 역주행을 시도했다. 완은 오늘 분명 교통사고로 죽겠구나 싶어 울컥했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공사 트럭이 보였다. 휘는 이미 반쯤 울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흐느낌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남자들은 우는 휘를 돌아보며 당황했지만 재밌어하는 눈치였다. 네 친구는 왜 그러는 거야? 마른 남자가 물었다. 완도 울고 싶은 참이었지만 둘 다 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담배 좀 피우지 말아 줄래. 차 속도도 줄이고. 그는 알겠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차는 잠시 주유소에 정차했다. 남자들은 담배를 물고 기름이 채워지길 기다렸다. 차 안에 남겨진 완과 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들이 확실히 사기를 당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완이 말했다. 내가 보기엔 그래도 기차를 놓칠 것 같진 않아. 근데 저 새끼들이 얼마를 부를지가 문제인 거지. 휘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택시비가 얼만지 우리 알잖아. 그 가격대로 주고 빨리 내리자.


안가라 역은 이르쿠츠크 역에 비해 아담했다. 주차장엔 지나다니는 사람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차가 멈추자마자 완이 손잡이를 당겼다. 역시나 문은 잠겨있었다. 휘도 덩달아 손잡이를 당기고 온몸으로 문을 밀었다. 움직일 리 없었다. 도착했어. 짙은 눈썹이 핸드폰을 켜며 말했다. 이것 봐 아직 기차가 출발하려면 20분이나 남았지? 마른 남자는 완에게 열차 앱 화면을 들이밀었다.


300달러야. 완과 휘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300달러라고. 우리가 여기서 택시를 타봐서 아는데 3만 원이면 충분해. 완이 택시 앱을 틀어 남자들에게 보였다. 마른 남자는 다리를 떨었다. 근데 이건 우리가 너희를 위급한 상황에서 도와준 거잖아. 그래서 특별가가 붙어. 반바지 사이로 보이는 금색 털이 눈에 띄었다.


잠긴 차 문을 휘가 쾅쾅 쳤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마른 남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눈을 부릅뜨고는 휘에게 삿대질을 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그가 휘를 치려 한 건 아닐까 완은 간담이 서늘했다. 휘를 때렸다면 앞 좌석에 앉은 눈썹 짙은 남자애의 목을 조를 생각이었다. 씩씩거리던 휘가 열린 창문 틈새로 소리를 질렀다. 눈썹 짙은 남자는 재빨리 창문을 올리고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희가 돈을 안 주면 다른 데로 가버릴 거야. 20분 남았어. 너희가 결정해. 차는 역 앞을 계속 배회했다.


줄게, 줄게. 기다려봐. 자꾸 코끝이 시렸다. 완은 가방 안을 뒤졌다. 다음 행선지에서 쓰려고 쟁여둔 100달러가 손에 잡혔다. 너 200달러 있어? 휘도 지갑을 열었다. 나 딱 300달러 있는데······. 문이란 문은 다 잠근 차 안에서 마른 남자는 담배를 피웠다. 차 안은 사우나처럼 덥고 습했다. 호흡이 가빠왔다.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 숨 막히는데, 창문이라도 조금 열어주면 안 될까. 완이 울먹였다. 안 돼. 돈을 주면 되잖아. 남자 둘은 한꺼번에 대답했다.


내가 나중에 200달러 줄게. 완은 울먹이는 휘에게서 200달러를 받아 건넸다. 양손이 덜덜 떨렸다. 돈을 받아 든 마른 남자는 완과 휘 눈앞에서 지폐를 셌다. 완과 휘는 주먹을 꽉 쥐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씩 웃었다. 동시에 차 문도 열렸다. 한꺼번에 차가운 공기가 몰려 들어왔다. 빨리 와, 빨리 와. 마른 남자가 재촉했다. 눈썹 진한 남자는 트렁크를 무심히 열고는 차 안에 남았다. 마른 남자는 재빨리 역 안으로 들어가 개찰구에 짐을 놓고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밖으로 나갔다. 앞에서는 눈도 못 마주치던 완이 그의 뒷모습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가 사라지자 온몸에 힘이 풀리고 눈앞이 아른거렸다. 열차가 개찰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휘가 배낭을 짊어진 채 엉엉 울었다. 완은 개새끼들, 개새끼들 하면서 덩달아 울었다.

 

일단은 괜찮은 것 같아요. 저희가 사진을 찍어두면 좋았을 텐데. 역 안에 감시카메라가 있다고 해서 그거 확인해 본댔어요. 완이 오이에 소금을 뿌리며 말했다. 잡히면 좋겠다. 나타샤가 아르야의 차에 꿀을 넣었다. 조금만. 아르야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완아 자? 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눈을 감고 있던 완이 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휘는 또렷한 눈빛으로 완을 보고 있었다. 완도 몸을 돌려 누워 휘를 마주했다. 할머니들이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야는 새근새근 잤고 나타샤는 가끔 들숨을 너무 크게 쉬어 드르렁 소리가 났다. 휘가 뺨을 손에 기댔다. 있지. 내가 얘기한 적 있었나. 예전에 쿠웨이트에 살 때 자주 어떤 소문을 들었어. 여자들이 혼자 돌아다니면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고. 도시는 고립됐고 사막은 엄청 넓잖아. 사람 하나 없는 사막에서 강간하고 거기에 시체를 버린 거지. 휘는 담담했다. 사실 어제 뒷자리에 타고 있으면서 우리가 강간당하고 어딘가로 버려지는 게 아닐까 싶었어. 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완은 시선을 내렸다. 아르야가 팔짱을 낀 채 자고 있었다. 더 화나는 건 뭔지 알아? 휘가 숨을 골랐다. 그 새끼들은 지네가 한 짓이 단순히 돈을 빼앗았다고 생각할 거란 거지.


발가락이 간질거렸다. 완은 고개를 들었다. 저번 경위 조사서를 쓸 때 봤던 경찰의 조수였다. 완은 눈살을 찌푸리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조수는 종이를 내밀었다. 완은 어렵사리 몸을 접어 그가 내민 종이를 확인했다. 남자 사진이었다. 이 사람이야? 그가 첫 번째 사진을 가리켰다. 전체적인 느낌은 달랐지만, 슬라브 인처럼 보였다. 상반신만 찍힌 사진으로는 잘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마 아닌 것 같아요. 완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이 사람은? 조수가 다음 사진을 가리켰다. 역시 슬라브인이었지만 체격이 있어 보였다. 아닌 것 같아요. 완은 말끝을 흐렸다. 알겠어. 그는 복도로 유유히 사라졌다.


완은 말보로를 입에 문 빼빼 마른 남자 꿈을 꾸고 있었다. 짧은 반바지 사이로 빠져나온 금발이 징그럽게 자라 완의 몸을 감았다. 꼼짝없이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완은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는 맥없이 입안을 맴돌았다. 눈앞에서 그가 아른거렸다.


완이 잠에서 깬 건 휘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어느새 일어난 휘는 어제처럼 아르야의 침대에 앉아있었다. 나타샤는 휘의 책을 신기하듯이 쳐다봤다. 아마 너무 무거워 보여서일 거라고 완은 생각했다. 나타샤의 시선을 느낀 건지 휘는 나타샤에게 책을 들어 보이며 《유라시아 견문록》 첫 페이지를 펼쳤다. 유라시아 지도가 있었다. 이층 침대 위에서 엎드려 둘을 지켜보던 완은 힘겹게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 나타샤 옆에 앉았다. 오늘도 얼그레이 향이 풍겼다.


여기가 블라디보스토크. 저희는 여기서 출발했어요. 휘가 지도의 가장 오른쪽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기차를 탄 거야? 나타샤가 말했다. 네. 죽을 뻔했어요. 완이 눈을 뒤집었다. 나타샤는 깔깔댔다. 여기가 예카테린부르크야. 나타샤가 지도 중간에서 약간 왼쪽으로 빗겨나간 곳에 점을 찍었다. 모스크바에서 얼마 안 머네요. 완이 눈을 부릅떴다. 모스크바에서 1년 공부할 거라 했지? 나타샤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얼마 안 멀지. 기차로 한 이틀?


기차가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나타샤가 같이 나가 산책을 하자 했다. 완과 휘는 하라쇼, 하라쇼를 연발했다. 정차하는 역마다 열차 거주인들을 위해 간식을 파는 가판대가 있었다. 서로의 체취와 음식 냄새로 갑갑하던 사람들은 기차가 오래 정차할 때마다 밖으로 쏟아져 나와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풀었다. 아이스크림을 빨며 서 있는 사람들이 단연 즐비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뚱뚱한 빵파레 아이스크림 같은 콘을 즐겨 먹었다. 휘와 완, 나타샤와 아르야도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기차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오랜만에 먹는 아이스크림은 달고 부드러웠다. 아르야가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든 채 허리를 돌렸다. 아르야의 체조를 본 휘와 나타샤가 그녀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완은 목을 돌리다가 푸핫 웃음이 터졌다. 셋 다 어딘가 엉거주춤해 보였다.


안지완 어디 있나요? 까까머리 승무원이 완을 찾았다. 네, 여기 있는데요? 완은 이름을 부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찰이 찾아요. 그가 손짓했다. 휘가 완을 따라왔다. 승무원이 가리킨 방향에는 검은색 바람막이를 걸친 여자가 피곤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 손에 들려있는 서류 뭉치들이 왜 그녀가 그런 표정일지 짐작하게 했다. 누가 안지완이죠? 그녀가 말했다. 완이 손을 들었다. 따라오세요. 완과 휘가 그녀 뒤를 졸졸 쫓았다. 아, 안지완만 오면 됩니다. 그녀가 휘를 보며 말했다. 완은 눈을 치켜떴다. 휘는 아주 억울한 얼굴로 “왜?” 입 모양을 지었다.


이쯤 되면 까까머리 승무원이 완의 전담인 듯했다. 그는 구글 번역기를 옆에 켜 놓고선 언제든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을 물어보라는 얼굴로 완 옆에 서 있었다. 간이 의자엔 피곤한 경찰이 앉았다. 그는 지금껏 작성된 완의 사건 경과서와 진술서를 훑었다. 완은 긴장한 채 다리를 떨었다.


지금 용의자가 안 나와요. 워낙 단서도 부족하고.

완은 본인의 번역기를 틀어 화면을 응시했다. 말이 너무 빨랐다.

협박했다고 했는데 어쨌든 그 남자들이 직접적으로 어떠한 가해를 한 건 아닌 거잖아요? 때렸다거나, 만졌다거나.


완은 까까머리 승무원을 쳐다봤다. 승무원이 경찰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완은 번역기로 추측할 뿐이었다.

완이 추측한 내용은 이랬다. 협박이란 게 있었다 해도 직접적인 가해의 증거는 없으니 피해 호소의 영향력이 없으며, 지금 문제가 되는 건 300달러의 돈을 어떻게 보상해줄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완은 그렇게 이해했다.


그럼 이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소린가요? 완이 되물었다. 경찰은 피식 웃었다. 아니 당연히 심각하지. 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와있는 거 아니니. 그녀는 서류 뭉치를 툭툭 쳤다.


조사의 방향이 바뀌었다. 경찰은 손해를 본 돈의 가치를 물어왔다. 300달러가 너에게 얼마나 소중한 돈이었냐. 너는 직장이 있냐. 결혼은 했냐. 임금은 어떻게 되느냐. 멍하니 번역기를 보던 완은 퍼뜩 고개를 들고, 나는 학생이고 일을 하지 않아 정기적인 수입이 없고 부모에게 돈을 받아 쓰며 대학도 장학금을 받고 다니고 모스크바로 유학 온 것도 장학금을 받고 온 것입니다, 하고 쉬지 않고 말했다. 완은 그 300달러가 완과 휘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벌기 어려운 돈인지를 새로운 단어를 찾아가며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복도로 걸어오는 데 제일 먼저 휘의 뒤통수가 보였다. 이리저리 뒤척이고 자느라 머리가 뻗쳐있었다. 완의 신발 소리에 휘가 뒤를 돌아봤다. 어떻게 되었냐는 표정이었다. 완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숨부터 나왔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입은 손해가 얼마냐’는 데로 초점이 이동했다는 거지. 넌 그래서 뭐라고 했어. 휘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뭐 존나 불쌍한 외국인 학생이라고 얘기했어. 돈도 없고 스물넷 되도록 직업도 없고 부모한테 돈 받아 생활하고 장학금 받으면서 학교 다닌다고. 너털웃음이 나왔다. 딱히 사실에 어긋나진 않았다. 완이 고개를 젖혔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휘가 완을 쳐다봤다. 그래 됐어, 잘했네. 완은 눈을 감았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곧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휘는 편지 구석구석 색깔 입히는 중이었다. 휘가 아빠에게서 선물 받은 만년필로 완은 오랜만에 러시아 필기체를 정성 들여 한 글자 한 글자 썼다.


마음이 한참 뒤숭숭할 때에 나타샤와 아르야를 만나 따뜻했어요. 오랜만에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봉투 위로 휘가 그린 할머니들의 얼굴은 꼭 캐리커처 같았다. 나타샤는 동그랗게 아담했고 아르야는 차분하게 우아했다.


침대 시트와 담요가 한쪽에 곱게 접혀있었다. 밖은 어둑해졌다. 완과 휘는 개인 이부자리를 피해 나타샤의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저기. 완이 말을 꺼냈다. 이거 선물이에요. 편지를 받은 나타샤가 아르야에게도 편지를 건넸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뒤집던 아르야가 그림을 가리키더니 본인을 가리켰다. 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바시바. 스바시바. 아르야가 천천히 웃었다. 편지를 읽던 나타샤의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너 이거 번역기 돌린 거지. 완이 어색해서 킥킥댔다. 나타샤가 한쪽 팔을 벌려 완을 안았다. 고마워, 고마워. 나타샤의 팔 힘이 그대로 전해졌다.


예카테린부르크 정차 시간은 한 시간 반이었다. 사위가 데리러 나오기로 했다던 나타샤와 아르야 옆에 완과 휘도 팔을 맞대고 서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왔다. 유라시아 대륙을 타고 온 바람은 바이칼을 지나 평야를 횡단해 건조하고 서늘했다. 개찰구는 서로를 껴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안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완과 휘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이 나타샤에게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나타샤도 덩달아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더니 완과 휘 쪽으로 돌아섰다.


다스비다냐.

다스비다냐.


나타샤가 사위에게 짐을 맡길 동안 아르야가 완과 휘에게 팔을 벌렸다. 아르야의 품 자리는 여자애 둘을 한꺼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다스비다냐. 아르야가 등을 두드렸다. 삶은 길고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찰나처럼 지나가. 건강해야 해. 완이 이해한 아르야의 마지막 인사였다. 


휘는 저 셋이 모여 있는 뒷모습을 꼭 찍고 싶다며 완을 닦달했다. 아니 대체 왜? 완이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완의 핸드폰을 양손으로 꼭 쥔 휘는 셔터를 두서없이 누르며 말했다.


일종의 단서 같은 거지.

무슨 단서?

우리가 참 아슬아슬하게도 살아남았다는 거.


완과 휘는 세 사람이 개찰구를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려면 아직 스물여섯 시간은 더 가야 했다.

그림 @박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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