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과 헤어지고 후유증을 앓고 있었던 때였다. 우연히 너와 연락이 닿았다. 우리 나이 21~22살 때, 서로 다른 국가로 유학 가기 전을 마지막으로 적어도 10여 년 만이었던 것 같다. 전혀 못 알아볼 줄 알았다. 여름 후드득후드득 거세게 떨어지는 장맛비 우산을 털고 멀리서 걸어왔어도, 너인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내가 남겼던 글이 화근이었다. 최근 근황을 압축해서 써 내려간 내 에세이를 읽은 후에 날 봤다고 했다. SNS 친구였던지라, 간간히 올라오는 내 글을 읽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 네 근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네 앞에서 모든 것이 까발려진 느낌이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10여 년 만에 만났어도 마치 늘 봐왔던 친구처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었는지부터 현재의 일상, 고민 등 모든 걸 털어놓았다. 가장 좋은 건 네게 다 털어놓고 난 뒤였다. 말을 해도 허무함을 남기는 관계가 대부분이었다. 네게는 어떤 말을 하든 위로와 안심이 되어 금세 나아졌다. 늦은 밤에도 이른 아침에도 카톡으로든 만나서든 그 시간이 언제든 어느 때고 말동무를 해주며 그때마다 크고 작은 해결책을 주었다.
마침 내가 일하던 직장 근처에서 살았던 네게 갑자기 점심 1시간 전, 저녁 1시간 전 불러도 어느 때든 모두 오케이 했다. 그때 찜닭에 한창 꽂혀있어 점심이고 저녁이고 만날 때마다 찜닭 먹자고 해도, 그것도 늘 오케이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긴 쓸데없는 걱정들이 많았던지라 찜닭 메뉴가 먹고 싶은데 네가 날 '찜닭'으로 볼까 봐 다른 거 먹어야 할거 같다고 하니 매번 그래도 상관없다면서타인의 시선일랑 아랑곳하지 말고, 스스로 먹고 싶은 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게끔 끊임없이 독려해주었다. 내가 나일 수 있게 도와주어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미국행 티켓이 확정됐다는 말에 애써 태연하고 싶었다. '시절 인연'이란 게 있어 여름 한철 어느 때고 '번개'로 갑자기 만나 밥만 먹고 쿨하게 헤어지고, 평일에는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이제 네가 미국으로 떠나버리면 갑자기 허전할까 싶어 '미국 가면 이제 시차 때문에 연락도 잘 못할 거잖아.'라고 얘기해도, 한국에서처럼 연락할 수 있다고 말해줬다. 막상 미국으로 떠나고 나니 바쁜 모양이었던 너와 한 동안 대화를 오래 나누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네게서 먼저 문자가 왔다. '카톡 프사 예쁘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여름 한철 네가 나에게 했던 말들과 동일한 맥락의 말들을 내게 다시 해주었다. 네가 미국에 가있는 동안 잊고 지냈던 말들이었다. 만약 네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털어놓았을 수많은 이야기들이 여기 있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도 너는 이렇게 말해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