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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앙 Aug 15. 2022

선배의 품격

블랙 택시


노력하는 하루가 쌓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세 달이 되며, 세 달이 두 번이 되면 곧 반기가 지나 1년이 된다. 이렇게 피, 땀, 눈물이 모여 365일이 되다 보니 고작 1~2년 차인데 무슨, 다 친구지! 하는 말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97학번 즈음 박사학위를 우리 대학에서 나오신 선배를 만났다. 대학 동문회 단톡방에서 소신 있는 발언을 하셨고 이로 인해 공격을 많이 당하시고 계셨다. 토요일 오후 지각할세라 헐래 벌떡 드로잉 공방에 나가려던 차, 공격받는 선배 모습에 이건 아니다 싶어 개인 톡이라고 하기엔 다소 긴 메시지를 하 보냈다. 요지는 속 시원히 소신 있게 의견을 담아 목소리를 내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였다. 3백여 명이 넘는 단톡방에서 개인의 의견을 담은 하나의 메시지는 무릇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나이스하고 젠틀하게 대응을 하기엔 이미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선배님의 용기 있는 의견 덕분에 우리 동문 공동체에 희망이 보인다는 얘길 덧붙였다. 선배는 한국에 돌아가면 꼭 보자는 말씀으로 회답을 하셨다. 한국인이라면 의례 인사치레인 얼굴 한번 보자, 밥 한번 먹자 정도인 줄 알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따분한 오후를 깨는 개인 톡 알람이 왔다. 한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였다. 까마득한 나이차가 났던 일면식도 없던 선배였던지라 살짝 겁을 먹었던 나는 소신 있는 의견을 내는 힘이 담겨있는 외모는 어쩌면, 우락부락할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또 한 명의 아는 선배님과 함께 보자는 말씀에 안도가 돼 퇴근 후 평일 저녁 만나기로 했다.


삼성동 횟집 황금어장 저녁 7시. 일찌감치 정시 퇴근을 해서 약속시간에 맞게 딱 당도했다. 내심 떨리는 마음이었는데 한 가지는 세대차로 인해 소통이 안 되면 어찌하나 와 또 한 가지는 성격이 불과 같아서 차라리 안 만날걸 그랬다며 후회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약속 자리에 나갈 만큼 좋은 이유랄게 딱히 없었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했다. 첫인상이 이렇게 선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뵌다면 늘 팀원들을 지원해주시는 든든한 부장님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중국 삼성에서 임원까지 하셨던 '중국통'이셨다.


회 정식과 스끼다시, 싱싱한 고등어구이와 동태탕 등이 눈앞에 있었으나 과연 선배님의 경험과 다독가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박학다식함과 풍부한 경험담에 유머가 어우러져 식탁 위를 풍부하게 했다. 배도 부르고 귀도 즐거운 식사자리였다. 몇 가지 선배가 해주셨던 말씀들이 두고두고 와닿았다. 저녁 술자리였던 만큼 주제는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가늠할 수 없는 주제 사이로 마구 헤엄쳤다. 인상 깊었던 선배의 말씀에 나의 소회를 덧붙여 보겠다.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 스스로 생각하라. 뭘 하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과 남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이 부분은 반드시 체화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는 핵심적인 말씀이셨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는 단순히 따라가는 자와 비교할 때, 무엇이든 그 결과물의 힘이 완전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 책의 20~30%만이 새로운 내용이다. 나머지 70%는 아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 이유는 새로운 내용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사서 읽지 않기 때문이다.

=> 새로운 분야일지라도 처음 접하는 책 5권 이하를 정독해서 제대로 간파하면 그 뒤로는 괴로울 일 없겠다


* 중국어 책: 중국에서 졸업 후에도 중국어로 된 책을 읽으신다. 오늘 가져오신 책은 환관인데, 옛날 환관에 대한 이야기 안에 인간 정치의 대소사가 다 들어있다.

=> 원어(영어나 중국어)로 된 도서를 꾸준히 하는 것은 짧은 칼럼이나 기사만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깊이를 자랑하는 것이다. 나도 이것을 취미로 만들고 싶다.


* 신문기사: 지금보다 좀 더 젊으셨을 때 홍콩잡지를 출간하는 곳에서 일하셨는데 매일 아침 부지런히 신문 스크랩을 하셨다고 한다.

=> 매일 아침의 루틴이 나를 만든다. 나는 영어나 중국어 원서를 도전해봐야겠다.


* 회사 보고: 보고할 때는 반드시 보고 대상자의 시각과 입장을 고려하여 진행한다. 말도, 문서도 마찬가지다. 


잔을 짠~할 때마다 '아름다울 미'가 어쩌다 양과 사람이 합쳐졌는지 각종 글자의 한자어 풀이를 비롯해서 중국 삼성에서 영업선을 뚫은 무용담들을 듣고 있노라면 해외영업을 안다고 생각한 나 같은 조무래기는 베테랑 앞에서 주름잡기 꼴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 무용담을 생생히 그리고 자세히 알고 싶어서 집에 오자마자 선배가 집필했다는 <지금이라도 중국을 공부하라> 책을 검색해서 빌렸다.


자유란 무엇인가. 수많은 자유 중 하나는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선배는 연륜만큼 미움받을 용기가 있었다. 그날 저녁 다음날 출근 컨디션 때문에 먼저 일찍 자리를 떠야 했던 나를 위해 또 다른 선배님이 택시를 불러주셨다. 사실 삼성동에서 금방이라 전철 타고 가면 된다고 여러 번을 말씀드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날 나는 '블랙 택시'란 걸 처음 타봤다. 삼성동에서 30분여를 타고 도착했는데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택시 뒷 좌석 널찍한 내부 안정감을 자랑했다. 대기업 회장님이나 탈 것 같은 택시였다. 그날 다짐했다. 후배를 매우 귀하게 대하는 선배의 모습으로 성장하겠노라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침대 같은 블랙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 성공하면 이런 느낌일까. '아~ 좋다'하다가도 '내가 이런 차를 타도 되나?' 하는 생각에 쪼랩이 되기를 왔다 갔다 했다. 그 짧은 거리에 6만 원가량 택시비용이 나온 걸 보고, '헉'하다가 턱밑이 땅 아래로 가 닿는 줄 알았다. 선배의 품격이란 무릇 후배로 하여금 '내가 너보다 한참 선배란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말과 행동과 얼굴 표정에서 아우라가 뿜어 나와 절로 배우고 싶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블랙 택시로 귀가하게 할 만큼 후배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다시 힘 내보자'는 생각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들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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