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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Aug 13. 2017

41. 스마트폰 중독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대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선택되지 않았을 뿐이다.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눈을 감아도 자꾸만 떠오르고, 보고만 있어도 한두 시간 정도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사라져 있다. 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는 중에도, 밀린 리포트를 작성하는 중에도, 혼자서 밥을 먹는 중에도 자꾸만 신경 쓰이는 이 녀석. 늘 곁에 있지 않으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녀석. 그래요, 스마트폰 얘깁니다.


 이 정도일 거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웬 덥수룩한 흰 수염의 중년 아저씨가 검은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짜잔 하고 나타나 아이폰 같은 걸 내놓았을 때만 해도 말이다.

 그 아저씨 회사가 미치게 좋아한 단어가 아마 '혁명'이었던가. 요즘 생활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자면 정말 이게 혁명이 아니면 뭐겠어, 싶다. 스마트폰이 만든 변화는 그야말로 혁명. 혁명이었으니까.

 스마트폰이 일으킨 가장 큰 혁명은 아무래도 소통의 혁명이 아닐까? 문자로, 전화로만 연락을 취할 수 있었던 과거를 청산하고 이젠 언제 어디서든 얼굴까지 보며 연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인터넷 망을 이용해 무료 통화와 무료 문자를 이용할 수도 있는가 하면, 문자를 조합해 만들었던 *^^*같은 이모티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화려하게 움직이는 이모티콘으로 나의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뿐이랴. SNS로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무슨 음악을 듣고 있는지, 어떤 음식을 먹고 있는지까지 전부 보여주고 알려줄 수도 있으며 기념일엔 직접 만나지 않아도 톡으로 선물을 전송할 수 있기까지 하니, 이 어찌 혁명이 아닐 수 있겠는가.

 여행에 일으킨 혁명 또한 어마어마하다지. 스마트폰 없는 여행이 가능하긴 한 걸까? 한 손 안에서 비행기 예약부터 먹을 곳, 잠잘 곳까지 해결 가능하게 됐으니 말이다. 특히 나의 경우, 스마트폰 세대에 막 탑승할 무렵 여행을 떠났었으니 스마트폰 없는 여행이란 게 그려지지 않을만하다. 구글 맵 없이, 숙박 어플 없이, 메신저 없이 여행이 가능하다고?! 싶은 거지. 어플을 이용해 숙소를 구했고, 구글 맵을 켜 현재 위치를 파악해 네비를 따라 길을 찾았다. 여행자 커뮤니티의 추천 레스토랑을 찾아내 실패할 확률을 줄이기도 했고, 여행의 막바지엔 카메라 꺼내기가 귀찮아 스마트폰 카메라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비상상황에 어디론가 급히 연락을 하거나 와이파이를 잡아 필요한 정보를 찾아냈던 경험까지 떠올리자니 어쩌면 여행에 있어 스마트폰이 비행기 티켓보다 중요한 건 아닐까, 싶어질 정도이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아마 돈은 없어도 스마트폰만 있다면 어떻게든 여행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세상이 왔어요, 여러분.

 금융계에서도 심심치 않게 혁명의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이름하야, 인터넷 뱅크. 인터넷 뱅크가 등장한지는 꽤 되었지만 괴물 기업이 되어가는 'ㅋ'사가 최근 이 사업에 뛰어들자마자 아주 난리가 났다. 이제 스마트폰은 은행까지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흐름일 수밖에. 한 손 안에서 귀찮고 복잡한 은행 업무를 해결한다는 게 참 매력적인 혁명이 아닐 수 없으니.


 이렇듯 변화가 비약적이니, 우리 주위의 풍경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굳이 분류하자면 부정적인 쪽으로. 판에 박힌 식상한 표현이긴 한데, 스마트폰은 우리에게서 편리함을 가져다준 대신 대화를 빼앗아 가 버린 것이다.

 이 모든 탓을 괜히 똑똑해서 죄인 스마트폰 씨에게 돌리고 싶지는 않다. 사실 몇 차례의 산업 혁명을 통해 새로운 문명이 도래할 때마다 우린 대화를 잃어갔다. 생각해 보라. TV를 '바보상자'로 부르던 때가 있지 않았는가. 그 앞에만 앉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바보처럼 웃고 울게 만든다 하여 '바보상자'라 부르던 TV, 그 등장에 우린 환호함과 동시에 회의적이었다. TV의 등장으로 밥상 앞의 대화가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가족들이 다 같이 '바보상자'앞에 둘러앉은 풍경은 더없이 따뜻한 그림이 되어버렸다. 서서, 누워서, 앉아서 언제든 볼 수 있는 개인 TV, 스마트폰이 생겨버렸으니 말이다. 이다음이 VR이 될지 뭐가 될지는 가늠되지 않는다만, 분명한 건 이 개인주의로 똘똘 뭉친 듯한 스마트폰 역시 언젠간 따뜻한 그림이 될 것이란 말이다. '바보상자', 텔레비전처럼 말이야. 그러니 애꿎은 스마트폰 씨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우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말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지금의 지하철 풍경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 허우적 대다 고개를 든 순간 그대로 굳어버린 경험이 있다. 내가 탄 칸의 모든 사람이, 정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린 같은 장소에 있는 동시에, 절대 같은 곳에 있지는 않구나.'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같은 곳에 있을 수 없겠구나. 사당으로 향하는 4호선 열차에 탑승한 그곳의 승객들이, 같은 목적지를 향하면서도 각기 서로 다른 열차에 탑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그들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옆 사람과 괜히 말 한마디 주고받는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거란 거 잘 안다. 다만 내 눈 앞의 그 풍경이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꼼짝없이 굳어 버렸다. 어렸을 적 과학상상화에 그렸던 아주 아주 먼 미래라고 생각한 세상이란 게,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이미 내 생활 깊숙이 녹아 있는 건 아닐까, 싶었던 거다. 거침없는 크레파스 칠로 채워진 막무가내 상상화 속 변화가 이미 내 무의식 속에 깊이 침투해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즘 친구들과의 만남 또한 내가 보았던 지하철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눈을 맞추는 시간은 점점 줄어만 간다. 대화가 사라진 데 이어 서로의 눈을 맞추는 일 마저 줄고 있다니, 아아, 개탄할 일이로다.


 사실 스마트폰으로 하는 일은 전혀 거창할 게 없다. 아니, 오히려 잉여롭고 쓸모없기까지 하다. 나의 경우, 게임 같은 걸 하지 않기에 무한정 서핑을 한다. 끊임없이 TV 채널을 돌리는 것과 같이, 꼬리에 꼬리를 문 기약 없는 서핑 말이다. 그로 얻은 정보로 이렇게 글을 쓸 소재를 얻을 때도 있다만, 목적도 목표도 없는 무한정 서핑은 나 스스로를 갉아먹는 짓일 뿐이다. 그걸 너무 잘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최대 장점인 무한성은 동시에 최대 단점이 되기도 한다. 끝이 없기에 주체성을 갖지 않으면 블랙홀에 빠지듯 홀려 버리기에. 이게 한 마디로 중독이다.

 중독을 끊는 방법은 단 한 가지. 하지 않는 것이다. 담배 중독은 담배를 끊어야, 알코올 중독은 술을 끊어야 중독을 끊을 수 있듯이 스마트폰 중독도 마찬가지이다. 스마트폰을 끊어야 중독을 멈출 수 있다.

 하나 스마트폰은 이미 내 생활 너무 깊숙한 부분까지 들어와 버렸다. 심지어 이 글도 스마트폰으로 적고 있는 걸요. 그러니 나는 스마트폰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다. 내 삶의 상당 부분이 마비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스마트폰을 정말 스마트하게 쓸 수 있는 방법 말이다.


 앞서 말했듯 대화가 사라진 탓을 스마트폰 씨에게 돌려선 안 된다. 만약 내 삶에서 대화가 사라졌다면, 혹은 사라지고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이제 기술이란 건, 필요(needs)가 아닌 욕구(wants)에 의해 선택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싶은데 필름 카메라 밖에 없던 시대엔, 필름 카메라를 선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다. 카메라가 필름 카메라 밖에 없으니깐. 하지만 이젠 디지털카메라가 있고, dslr에 미러리스 등 다양한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선택을 하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빠르고 간편한 걸 원하는 사람은 디지털 카메라를, 여전히 필름의 감성을 간직하고 싶은 사람은 필름 카메라를 선택하면 된다.

 우리가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대화도 마찬가지다. 우리 곁엔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 속 세상을 택했다면, 그건 오로지 내 욕구에 의한 선택이다. 31가지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선택하듯, '대화'라는 아이스크림을 제쳐두고 다른 맛을 고른 것이다. 그래서 내 책임이라는 겁니다. 사실 대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선택되지 않았을 뿐이니까.


 스마트폰의 '스마트'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화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과연 스마트한 기기가 제시하는 방향일까? 검은 티에 청바지를 입은 그 아저씨도 이런 세상을 바랐을까?

 만약 지금 내 앞에 소중한 사람이 말을 걸고 있다면, 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다면, 스마트폰은 잠시 내려두는 건 어떨까. 스마트폰의 '스마트'의 의미가 중독의 유혹 앞에서도 소중함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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