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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Oct 19. 2020

나 파리지앵 친구 있는 사람이야

진짜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

 나는 거절을 잘 못한다. 부탁이라면 일단 ‘넵’하고 답하는 현대인들의 고질병을 ‘넵병’이라고 하던데, 아마 나는 ‘넵병’ 말기 환자 수준인 것 같다.

 평소에도 거절을 힘들어하는데 무료로 신세지는 카우치 서핑에 거절이 웬 말이었겠는가. 호스트의 모든 제안에 나는 ‘넵’으로 일관했다. 피곤하고, 배고프고, 아프고, 힘들어도 공짜니까 ‘넵’이어야 했다. 갑, 을 관계를 만든 건 나였다. 자발적 ‘을’이 되어놓고선 쌍방으로 소통할 수 없음에 속상해했다. 어쩔 수 없다. 기질인 걸.

 원체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수줍음까지 많은 내가 아무런 대가 없이 낯선 사람 집에서 신세를 진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일이다. ‘주인과 손님’이라는 편견 섞인 위계질서가 이미 머릿속에 자리 잡았으니 카우치 서핑으로 진짜 친구까지 만들어 보겠단 건 지나친 욕심 같았다.

 물론 간혹 호스트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한국에서 사 온 작은 기념품을 선물하는 것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달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빚진 마음이 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관계란 기브 앤 테이크. 핑퐁처럼 서로 주고받아야 쌓이는데 나는 지나치게 받고만 있는 것 같았다.

 빚을 지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각자 먹을 것은 각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서로에게 물질적 빚을 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카우치 서핑 홈페이지를 뒤져본 결과 숙박 말고도 가볍게 만날 수 있는 ‘행아웃(hang out)’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장 여러 명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마야라는 친구에게 답장을 받았다. 마야는 파리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동갑내기 프랑스 여학생이었다.

 마야를 만나기로 한 곳은 Châtelet역 앞의 맥도날드. 실제로 만나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키(180cm은 되는 것 같았다)에 한 번 놀랐고, 한국에 대한 관심에 또 한 번 놀랐다.

 마야는 니콜라처럼 한국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김치찌개와 불고기가 파리에선 너무 비싸다며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마이너한 한국 뮤지션들까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한국어도 몇 가지 자랑했는데, 그중 ‘쭉쭉빵빵’이나 ‘뚱뚱해’같은 어감이 재미있다며 계속해서 ‘뚱뚱해’를 외치기도 했다. 은근히 나를 돌려 까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우리는 하루 종일 파리 시내를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영화 <비포 선셋>에 등장한 셰익스피어 서점에 가기도 하고, 누텔라가 잔뜩 발린 달콤한 크레페를 먹기도 했다. 첫날 방문한 노트르담 대성당도 다시 방문했다. 마야와 함께 보는 대성당의 느낌은 또 새로웠다. 그밖에 다른 여러 곳을 방문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파리의 거리 산책이다. 현지인인 마야 옆에 딱 달라붙어 파리 시내를 누비고 있으니 근본 없는 자신감까지 솟았다.

 ‘나 파리지앵 친구 있는 사람이야...!’

 가끔 언어의 장벽에 부딪힐 때도 있었지만 수준급의 영어를 구사하는 마야가 찰떡 같이 알아 들어줘 소통에 큰 문제는 없었다. 마야는 내가 바라던 ‘빚 지지 않아도 되는 친구’였다. 우리는 다음 날 또 만나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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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ct : shun-y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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