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소울푸드(1) 팥빙수
여름이 다 가버린 이 시점에 이런 글을 쓰는 게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까지 더위가 전부 가시지 않은 관계로 내 사랑 '빙수'에 대한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빙수를 정말 좋아한다. 요즘엔 녹차빙수, 딸기빙수, 자몽 빙수 등등 정말 많은 빙수가 나오는 바람에 빙수의 정체성이 좀 애매해졌지만, 빙수는 역시 팥빙수다. (반박하고 싶은 분은 덧글을 달아보세요.)
팥빙수에서 중요한 재료는 뭐니 뭐니 해도 팥이다. 부산에서 시작한 빙수 전문점 설 X의 출현으로 빙수는 역시 얼음의 문제(!)로 판도가 뒤바뀌며 웬만한 카페에선 너도나도 달콤함 우유얼음을 사용한 빙수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팥빙수의 화룡점정은 팥이다. (어떤 카페에선 팥이 없는 팥빙수를 팔기도 한다. 달콤한 우유얼음만 먹으라는 거다. 이건 팥빙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팥은 마트에서 파는 시판 통조림은 최악이다. 시판 통조림 팥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한 입 먹어보면 코끝까지 설탕의 단내가 찌르면 그건 두 말 말고 시판 통조림 팥이다. 아마 보존상의 이유로 설탕 등 조미료를 잔뜩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빙수에선 이런 시판 통조림 팥을 사용한다. 아무래도 저렴하고, 간편하니까! 이렇게 만들어진 팥빙수는 다른 재료도 좋을 리 만무하다. 대부분 시판 떡이나 젤리, 대충 갈아 넣은 얼음, 연유 몇 번 뿌려주면 끝이다. 그 위에 투게더 아이스크림 한 스쿱 올리고 그럴듯하게 예쁘게 장식만 해주면 너도나도 좋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업로드한다. #팥빙수, #맛집, #존맛 이런 해쉬태그와 함께. 이러니 맛없는 팥빙수는 계속해서 순환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겉으로 그럴싸한 빙수 사진 보고 막상 가게를 찾아가면 맛은 형편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일했던 카페에서도 이런 식으로 팥빙수를 만들었다. 만원에 가까운 돈 받으면서.
그렇다면 맛있는 팥이란 무엇이냐. 당연한 말이지만 직접 수확.. 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성스레 직접 쑨 팥을 쓰는 곳이 확실히 맛있다. 생각보다 이런 집은 많지 않다. (여담인데, 팥빙수도 하나의 요리라고 생각하면 직접 팥을 쒀서 빙수를 만드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 직접 쑨 팥은 프리미엄 취급받는다.)
최근에 먹었던 빙수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홍대의 어느 작은 팥 전문점에서 먹은 빙수였다. 잡지 기사에 나와있는 '팥이 맛있다'는 정보만 가지고 찾았던 그 카페의 외관은 기대와 다르게 매우 허름했다. 실내는 테이블 두 개가 고작이었고, 주인아주머니 혼자 제조부터 매장관리까지 전부 책임지고 계시는 듯 보였다. 아주머니는 매우 친절하게 손님을 받았다. 빙수 가격은 중, 대짜리 두 가지가 있었는데 중이 6,000원 대가 8,000원으로 매우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요즘 빙수 전문점에서 형편없는 빙수를 만원 넘는 가격으로 파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저렴하다. 메뉴는 팥빙수와 녹차빙수 두 가지뿐이었고, 팥 전문점이다 보니 팥죽이나 팥이 든 떡도 판매하고 있었다. (여름이어서 팥죽도 개시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팥빙수를 중 사이즈로 하나 시켰다. 6,000원짜리 팥빙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파는 빙수와 양이 거의 비등했다. 비주얼은 옛날에 먹던 그 팥빙수 모양 그대로. 우유얼음이 아닌 물 얼음 위에 연유를 뿌리고 그 위에 팥을 듬뿍, 그리고 떡 두어 세 게를 올림 것이 끝. 한 입 맛을 봤다. 오, 팥이 달지 않고 고소하면서도 혀끝에 착 감기는 것이, 이 곳은 정말 제대로 팥을 쑤는구나 싶었다. 그동안 프랜차이즈와 비싼 카페의 우유얼음에 길들여진 혓바닥에 커다란 깨달음을 안겨주는 맛이었다. 역시 팥빙수는 팥이지, 라는. 얼음은 그냥 평범한 물 얼음이었고, 위에 올라간 아이스크림도 하겐다즈가 아니었지만, 팥이 모든 걸 올 킬 해버렸다. 위에 올라간 떡도 팥의 퀄리티 못지않게 맛있어서 새삼 감동했다. 아직까지 서울에서 이런 가격에 이런 질의 빙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그곳은 팥을 직접 쒔다는 이유로 프리미엄 행세를 하지 않았다. 마치 십 년이 넘은 뚝심 있는 골목길 국밥집에서 당연한 듯 매일같이 번거로운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듯이. 빙수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카운터의 아주머니에게 가져다 드리니 "팥이 모자라진 않으셨어요?" 하고 묻는다. 팥은 원한다면 무한으로 제공해 주는 것 같았다. 팥렐루야. 빙수계의 예수님이 나타났다. 그러나 리필받지 않아도 충분한 양의 팥이었기에 "네, 맛있게 잘 먹었어요." 하고 나왔다. 카페의 문을 나서는 순간 아, 여긴 또 오겠구나 싶었다. 기대와 달랐던 작고 허름한 외관만 보고 들어가길 주저했던 아까의 나를 반성하며.
빙수를 워낙 좋아했던 건 아무래도 스무 살 무렵이었다.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데, 음식도 예외는 없다. 스무 살의 내가 꽂혔던 음식은 팥빙수였다. 어느 정도로 좋아했느냐 하면, 아침에 눈 뜨면 하는 일이 얼음 가는 기계로 빙수 만들 얼음을 가는 일이었을 정도다. 삼시 세끼를 빙수를 먹었다. 배탈도 났었다. 그 정도로 좋아했다. 빙수를 하는 카페라면 혼자라도 가서 1 빙을 해치우기 일쑤였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빙수는 내가 만든 빙수였다.
내가 만든 빙수의 레시피는 간단하다. 얼려놓은 얼음을 열심히 갈아 그 위에 팥과 (생각해보니 심지어 집에서 혼자 팥을 쑤었던 적도 있다.) 시리얼 (스페셜 K 오리지널 올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리고 각종 견과류를 올리고 우유를 부어 먹었다. 팥은 직접 쑨 것을 올린 적도 있지만, 그렇게 매일 하기란 워낙 귀찮은 일이 아니므로 어쩔 수 없이 시판 팥을 올린 적도 많다. 이 팥은 위에도 말했듯 너무 달아서, 다른 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얼음에 팥, 바삭한 시리얼과 견과류 팥,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이었다. 연유 같은 건 뿌리지 않았다. 약간 차가운 시리얼을 먹는 듯 한 느낌이기도 했다. 삼시 세끼 이 것만을 먹었다니, 새삼 그때의 내가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앞서 빙수는 역시 팥빙수라 밝혔지만, 사실 난 설 X 같은 프랜차이즈의 빙수도 사랑한다. 설 X이 서울에 진출하기 전엔 부산에 몇 개의 지점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당시 부산에서 처음 인절미 빙수를 먹고 감동한 기억이 있다. 한 숟가락 입에 넣는 순간 이건 빙수계에 큰 획을 그어 놓을 미친 녀석이란 것을 직감으로 깨달았다. 그 이후 부산 여행 내내 부산 각지에 있는 설 X에 찾아가 치즈 빙수, 흑임자 빙수 등 골고루 섭렵하고 돌아왔다. 빙수 덕후의 예리한 직감답게 일 년 뒤 인절미 빙수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폭발적인 인기 뒤엔 빙수기계의 위생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낳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계속해서 새로운 메뉴를 내놓으며 성공신화를 이어나가는 듯하다. (바나나 케이크 빙수가 새로 나왔다던데, 먹어보고 싶다. 쩝)
성신여대 근처에 정말 좋아하던 빙수를 팔던 카페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빙수답게 직접 쑨 팥과 심플한 얼음만을 사용했는데, 그 맛이 매우 건강하고 담백하여 혼자 가서 몇 번 먹었을 정도였다. 최근에 그곳 빙수가 너무 먹고 싶어 찾아갔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빙수 기계 관리가 너무 힘들어서, 그렇다고 그냥 팔기엔 양심에 찔려 이제 안 한다."라고 하셔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주머니의 양심선언을 듣고 나니 그 빙수가 더욱더 그리웠다. 적어도 그동안 내가 그곳에서 먹었던 빙수는 그런 양심 속에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었을 테니까.
올해는 빙수를 많이 못 먹었다. 빙수 가격도 너무 많이 오르고, 내가 원하는 빙수를 파는 곳도 많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올해는 삼시세끼 빙수를 먹던 내게 아쉬운 커리어가 되어버렸지만, 내년을 또 기대해본다. 겨울엔 아무래도 빙수는 잘 안 당기니까, 내년 여름을 기대해보자.
아, 빙수 먹고 싶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