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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Mar 26. 2017

23. 인생에도 레시피가 있었으면 좋겠어

어차피 인생에 레시피 같은 것은 없다.

 스무 살 무렵, (지금 생각해보면) 별 시답잖은 고민들로 괴로워했던 때가 있다. 고민의 종착지는 세상의 모든 젊은 사람들이 공감할 그곳,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역이었다.

 당시 나는 재수생이었다. 때문에 자신에 대한 확신이 흐릿했다. 그림만 그리다 연기를 시작한 지 겨우 1년, 나 자신을 시험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 편, 실패했다는 실망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실망감은 막연한 불안감만 증폭시켰다. 난 무엇이 될까, 이 일로 밥은 먹고살 수는 있을까, 맞는 길로 가고는 있는 걸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고민이긴 하지만 당시의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는 크기로 불어 있었다.

 19살에서 고작 한 살 더 먹은 스무 살이 되었을 뿐인데 1년이란 시간이 통째로 내 것이 되어버렸다. 19년간 유치원이건 학교건 어찌 됐든 일종의 '스케줄'이란 것이 있었던 생활이었는데, 이젠 내가 스케줄을 짜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안 알려줬는데 말이야. 이제 막 걷기 시작했는데 세상으로 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1부터 10까지 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다니, 어른의 영역이라 생각한 것이 내 영역이 되었던 것이다. 아니, 어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난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는 어른이었다. 물론 부모님이라는 지붕 아래인 건 여전했으나, 심리적으로 경험하는 스무 살은 부담이 엄청난 시간이었다. '오직' 나의 행동과 결정만으로 1년의 결과물(대학의 합격, 불합격 여부)이 눈 앞에 보인다니. 준비된 어른(이란 게 있는진 모르겠다만)에게도 이 같은 조건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새삼스럽지만 우리나라 고3, 재수, n수생들에게 너무 가혹해. 힘내세요.

 준비되지 않은 어른이 되어서인지, 막연하게 펼쳐진 시간들은 내게 '살아간다'는 느낌보단 '버틴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아침에 눈을 떠도 눈이 부시지 않았고, 밤에 잠을 자려 눈을 감아도 꿈꾸지 못했다. 뭔가 해보겠다고 엄마, 아빠 방까지 뺏어 들어가 으쌰 으쌰 한 분위기를 조성해봤지만 사방의 벽면은 매일 조금씩 줄어들어 나를 옥죄이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던 와중에 요리를 시작했다.

 솔직히 처음엔 조금 '욱'하는 마음에 요리를 시작했음을 고백한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내내 기숙사에서 살았기 때문에 집에서 밥 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오면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는 정도였는데, 졸업을 하니 밥 해주던 기숙사 식당도 없었고, 밥 해주던 엄마도 없었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엔 매일 같이 밥을 해주셨었지만, 내가 졸업을 하니 일이 더 바빠져 있었고 때문에 내 밥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에야 당연히 엄마가 내게 밥을 차려줘야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지만, 당시의 나는 매일 밥을 차려줬던 그 엄마가 이젠 없다는 사실이 섭섭했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부끄럽고, 반성한다. 어찌 됐든 당시 나는 그런 '욱'하는 마음에 요리를 시작했다. 나 스스로도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어른 흉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에서 시작한 이 요리라는 것이 내게 있어서 전혀 의외의 부분을 건드렸다. 요리는 인생과 달리 '레시피'가 있었고, 이 '레시피'가 내게 희망을 줬던 것이다.

 '버티고 있다' 느낄 정도로 갈증 나고 막막한 내 삶과 달리 요리에는 정답이 뚜렷했다. 달걀흰자를 저어주면 거품이 난다, 소금을 넣으면 음식에서 짠맛이 난다, 파스타 면은 8분 정도 삶으면 딱 적당하게 익는다, 댤갈 프라이는 낮은 불에서 익히면 반숙으로 맛있게 익는다……. 내 인생과 달리 요리는 레시피만 따르면 정답에 도달했다. 레시피를 따라 원하는 결과에 이르렀을 때는 일종의 쾌감이 일어났다. 그래, 이렇게 되어야지! 싶은 마음 말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요리가 좋아졌다. 그리고 나는 요리의 매력에 빠지고야 말았다.

 요리를 위해 장을 보는 것부터가 즐겁다. 대충 메뉴를 생각하고 나면 마트로 달려가 음식 재료를 구경한다. 다양한 색깔을 가진 재료들, 다양한 디자인의 식료품 패키지 디자인을 구경하고 있자면 어째 옷이나 신발을 쇼핑하는 것보다 더 재밌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다닐 때도 꼭 한 번씩은 그 도시의 시장이나 마트에 들러 구경을 했다. 왠지 그 도시다운 냄새가 풍기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난 냄새를 못 맡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빨강, 노랑, 초록의 다양한 재료들을 카트 안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머릿속에서 곧 만들어 먹을 음식을 조리해본다. 상상 속의 음식은 파스타가 되었다가, 리조또가 되었다가, 스튜가 되었다가, 찌개가 되었다가, 볶음밥이 되었다가, 다시 파스타가 된다.

 장을 봐온 재료를 손질하는 과정은 썩 유쾌하진 않지만, 엉켜있던 생각 혹은 고민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준다. 양파 껍질을 하나씩 벗기고 있자면 시답잖은 고민도 한 겹씩 벗겨져 나가는 것만 같고, 흙이 묻은 감자 껍질을 씻겨내고 있자면 왠지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재료들에게 말을 걸어줘도 좋다. '넌 어디에서 왔니?',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껍질을 벗은 모습이 더 예쁘네'. 중요한 건 혼자 있을 때만 말 걸어라. 누가 보면 신고한다.

 재료가 준비되면 본격적으로 요리가 시작되는데, 조금 정신없는 과정이긴 하지만 굉장히 유쾌하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가 되어 악기들을 진두지휘 하는 기분이다. '거기 물은 조금 더 팔팔 끓고 있도록!', '당근 써는 소리는 4/4박자로!', '소금 뿌리는 소리는 좀 더 라이트 하게!' 이건 속으로만 생각해라. 말로 뱉었다간 진짜 누가 신고한다. 사실 혼자 요리를 하면 쉴 틈 없이 바쁘기 때문에 저런 쇼를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다만 그 리듬을 몸소 느낄 수는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처럼 내가 어떤 리듬에 의해 요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참 즐겁다.

 요리가 끝나면 가장 즐거운 시간이 온다. 바로 시식 시간! 그리고 동시에 이 시간은 레시피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레시피를 따른 음식들이기에 맛이 있다.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나선 '그래, 이렇게 되어야지!' 하고 속으로 나지막이 내뱉는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만든 음식은 다 맛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진짜다. 요리에 소질이 있나 봐.


 요즘은 요리를 잘 하지 않는다. 요리하는 것과 불안함이라는 감정이 비례한다면, 스무 살의 내가 그토록 요리를 많이 했던 것은 그만큼 불안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정답이 있는 어떤 행위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시피대로만 한다고 해서 늘 요리에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레시피를 무시하고 나만의 방법으로 만들었을 때 오히려 더 맛있게 된 적도 있고, 레시피대로 똑같이 했지만 새까맣게 타거나, 못 먹는 상태가 되었던 적도 있다. 인생이란 게,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레시피가 있어도 실패할 수 있고, 레시피가 없어도 성공할 수 있는 것,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것, 그런 게 인생 아닌가.

 여전히 나는 미래가 불안하다. 전역하고 무엇을 할지 고민이고, 서른 살의, 마흔 살의 내 모습이 어떨지 기대되기보단 두려움이 앞선다. 젊음이란 특권이 특권처럼 느껴지기보단 숙제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내가 될지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인생에도 레시피가 있었으면 좋겠어'하고 생각하곤 한다. 어찌 됐든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가이드라인은 제시해주니까.

 하지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어차피 인생에 레시피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일단 살아보는 수밖에.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의 레시피로.

 엄마는 엄마가 처음이고 아들은 아들이 처음이듯, 나 역시 내가 처음이다. 나란 사람을 내가 처음 겪는데, 레시피가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레시피 있으면 재미없을 걸요. 이것과 저것을 섞으면 원하던 그것이 된다!, 이거 너무 재미없잖아요. 그래, 생각해보니 인생은 정답이 있는 편 보다 없는 편이 더 재미있겠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어디에 갈지, 누구를 만날지, 무엇을 먹게 될지 궁금하니까. 내일이 기다려니까.

 뭐, 정 불안해서 안 되겠다 싶으면 부엌으로 가야겠다. 그리고 요리하면 된다. 재료한테 말 걸고, 지휘하고, 만들어진 걸 입 안에 넣고 있으면 조금은 진정될 것이다. 엇, 그러고 보니 이건 내가 찾은 인생 레시피네. 그래, 이렇게 만들어가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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