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뉴의 미래
최근 들어 베뉴(venue)란 단어가 우리 주변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작년 유니크 베뉴를 선정하여 컨벤션이나 전시회 등 행사 개최지로서 기존 호텔이나 컨벤션센터 이외 공간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는 동네 예식장도 웨딩 베뉴라는 말로 홍보를 하기도 하고, 베뉴란 단어의 뜻조차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렇다면 베뉴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면, 베뉴(venue)란 콘서트, 스포츠 경기, 회담 등의 장소로 정의되어 있다. 즉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 경기장, 컨벤션센터 등 행사가 열리는 장소를 우리는 베뉴라고 부른다. 코엑스나 킨텍스 직원들의 명함을 받아보면 베뉴 마케터라고 쓰여있다. 다시 말하면 행사가 열리는 장소, 또는 공간이 베뉴인 것이다.
콘서트, 스포츠 경기, 컨벤션, 전시회는 엄밀히 따지면 각기 다 다른 성격의 행사들이다. 콘서트는 음악을, 스포츠는 승부를, 컨벤션과 전시회는 MICE라는 의미의 비즈니스 이벤트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모든 행사들은 서로 같은 공간에서 열리고 있다. 본래의 용도로 써야 할 베뉴들이 서로 다른 행사들을 유치하고 있는 것이다. 베뉴의 경쟁환경이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가?
경쟁환경의 변화
컨벤션센터는 MICE 행사만 유치하지 않는다. 킨텍스는 김연아 아이스 쇼 유치를 위해 전시장 바닥을 빙판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정치인들은 자기 세를 과시하기 위한 전당대회의 장소로 대형 컨벤션센터를 선호한다. 또한 스포츠 경기장이나 박물관, 미술관들도 고유의 스포츠 경기나 아트 전시뿐 아니라 국제회의, 콘서트 등의 행사를 유치한다. 이렇게 경계가 없어지고 마케팅이 융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이런 시설을 방문하는 관람객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관람객들은 어떤 형태의 행사이건 그것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면 결국 여러 가지 선택지에서 한 군데를 선택한다. 여유 있는 주말을 보내기 위한 나들이 장소로, 또 연인과 함께 할 데이트 공간으로, 아니면 문화와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목적지로서 베뉴를 선택하게 되는데, 결국 그 관점에서 본다면 베뉴나 전시 마케터들이 공략해야 할 지점은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바로 ‘관람객의 여가시간(Leisure Time)'인 것이다.
아래 그림에도 나와 있듯이, 경기장이건, 공연장이건, 또는 쇼핑몰이나 컨벤션센터, 테마파크 등은 모두 관람객, 즉 고객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떤 목적이건 여가시간을 보내기 위한 장소로서 존재한다. 행사 주최자와 베뉴 운영자들은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 행사의 가격, 질 등을 제공해서 만족을 주어야 하며, 이것은 결국 관람객이 느끼는 경험의 가치로서 평가된다.
“콘텐츠 자체보다 콘텐츠에 대한 실제 경험이 승리를 불러온다.”
그런데 최근들어 고객들이 베뉴나 행사를 통해 얻는 만족은 단순히 행사 자체의 콘텐츠뿐 아니라 그 콘텐츠를 경험하고 체험하는 장소와 시간, 케이터링, 분위기 등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콘텐츠 자체보다 콘텐츠를 획득하는 전체적인 경험이 더 중요시 된다는 것이다. 요즘 세대들은 행사장이 어딘가, 어떤 공간구성인가 역시 전시회 등을 방문하는 중요한 동인이다. 럭셔리 제품 자체보다 럭셔리를 구매하는 실제 경험이 중요해지듯, 행사자체보다 행사를 경험하는 모든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따라서 주최자는 베뉴의 선택지를 콘텐츠의 컨셉에 맞추어 넓게 고민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결국 베뉴간의 행사 유치를 위한 경쟁을 불러오는 것이다.
최근 국제베뉴경영자협회(IAVM)에서 발간한 Facility Magazine에는 왜 Z세대를 베뉴와 전시 마케팅의 타깃으로 해야 하는지가 분석되어 발표되었다.
Z세대는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란 말로도 표현되는데 이들은 1978년 이후 출생한 세대로서 유년시절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되어 신기술에 민감하고, 소비활동의 50%를 온라인으로 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관계 형성을 하는 특징이 있다. 이들이 현재 비즈니스의 중심 실무 세대가 됨으로써 전시나 이벤트 등의 주 참여주체가 된 것이다. 이런 세대 변화의 특징은 아래와 같은 베뉴와 전시 트렌드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① 단순 정보제공보다 체험을 통한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라.
#테이트 모던(Tate Modern) : 전 세계 복합 문화공간의 트렌드 세터
영국 런던에 위치한 테이트 모던은 화력발전소를 리노베이션 하여 만든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모든 시민의 예술적 수준을 높이려 하지 않는다. 오직 20대 여성을 타깃으로 모든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 심지어 미술관에 입점한 카페, 기념품샵, 주차장까지도 젊은 여성의 트렌드를 반영하여 디자인하고 있다. 이들은 왜 20대 여성을 주 타깃으로 삼을까? 그것은 바로 이들이 현재의 주 소비층이자 정보 확산의 허브이기 때문이다. 20대 여성이 움직이면 그 동선은 유행이 된다. 20대 여성이 즐겨 찾는 공간은 바로 핫플레이스가 되어 버린다. SNS를 통해 콘텐츠가 공유되고 확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이트 모던은 20대 여성을 공략하기 위해 설립 초 ‘음악’을 주 미디어로 활용하여 음악 콘서트, 음악과의 연계 전시, 이벤트 등을 기획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미술관 공간에서만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끊임없이 공유하고 확산했다. 단순히 보고 듣는 콘텐츠가 아니라 느끼고 경험하고 공유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한 결과, 테이트 모던은 전 세계적으로 20~30세대가 가장 방문하고 싶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행사 기획자들에게도 트렌드를 선도하는 콘퍼런스, 포럼, 전시 등의 공간으로 각인되었다.
② 전시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라.
인스타 워시(Insta-worthy)라는 말이 있다. 콘텐츠를 소비할 때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바꿔 말하면 아무것도 필요 없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의 소비는 필요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나를 드러내고 소비행위가 다른 이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해진다. ‘인스타 워시’는 바로 이런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Z세대의 전시 참가자들은 단순히 정보와 네트워킹만을 하러 가지 않는다. 내가 바로 이런 트렌드를 주도하는 공간에 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CES2018로 검색하면 약 75,000개의 태그가 검색된다. 사람들은 전시공간 안에서의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내고 싶어 한다.
③ 콘텐츠 자체보다 콘텐츠의 연결(Connect)이 더 중요하다.
2013년 홍콩에서 열린 Art & Museum Summit에서는 베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A venue is not a building, and it's not a collection, and it's not the people who go there. A venue is an idea.”
“미래의 베뉴는 건물도 아니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컬렉션도 아니고 또는 베뉴에 오는 사람들도 아니다. 베뉴는 아이디어다.”
베뉴가 아이디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을 해석하면 베뉴는 하드웨어나 전시 콘텐츠, 또는 방문객 어느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베뉴가 아이디어라면 그 자체로는 형태가 없다. 다만 그것이 구현되는 장소가 베뉴이고, 플랫폼이 전시이며, 구현된 콘텐츠는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공유되고 확산된다. 결국 베뉴는 다양한 형태의 아이디어를 형상화할 수 있는 그릇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콘텐츠의 미래’의 저자 바라트 아난드는 콘텐츠보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연결’에 있다고 하였거니와, 베뉴나 전시 콘텐츠 역시 그 자체의 중요성보다 콘텐츠의 연결과 확산을 통해 끊임없이 베뉴와 사람, 사람과 콘텐츠가 연결되는 구조가 중요하다.
이제는 베뉴 운영자나 전시 콘텐츠 기획자 입장에서도 단순히 행사를 유치하고 기획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Z세대를 공략할 콘텐츠를 창조해내고, 그 콘텐츠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공유되고 확산되어, 다시 전시장에 사람들이 유입되는 선순환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 베뉴의 미래는 행사 자체가 아니라 행사를 통해 관람객에게 디지털과 연결되는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다.
<본 글은 2018 전시저널 1-2월호의 기고 요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