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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자본

by 최정식

조금 앞서 나서는 것, 먼저 말을 건네는 것, 길을 내어주는 것—이 모든 사소한 행위들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힘이 숨어 있습니다. 상징자본이라는 이름의 무형 자산입니다. 물질적인 재산처럼 숫자로 계산되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신뢰와 존중을, 또 다른 이에게는 자존감과 품위를 안겨주는 힘이지요.


마주 선 두 사람이 하나의 좁은 징검다리를 두고 누가 먼저 건널지를 고민하는 순간을 떠올려봅니다.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다면, 둘 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조용히 발을 뒤로 빼고 길을 양보하면, 그 물러섬은 단지 후퇴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메시지이고, 때로는 자신이 가진 여유와 배려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습니다. 직급이나 재산처럼 눈에 띄는 힘도 있지만, 말투 하나, 시선 처리 하나에도 사람들은 그가 가진 ‘가치’를 읽습니다. 말없이 문을 잡아주는 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몸짓, 먼저 인사하는 미소—이런 작은 행동들은 모두 상징자본을 형성하는 기초입니다.


상징자본은 그 자체로 교환되거나 팔 수 있는 자산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관계의 맥락 속에서 유효하게 작용합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 상징자본이 축적된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신뢰를 얻고, 갈등 속에서도 무게를 지닙니다. 그리고 그 힘은 타인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고 조율하는 데 쓰일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물론, 상징자본은 쉽게 쌓이지도, 영원히 보장되지도 않습니다. 타인을 깎아내리는 우월감으로는 진정한 자본이 형성되지 않으며, 겉치레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징자본은 언제나 진심과 일관성을 요구합니다.


요즘같이 빠르고 복잡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주목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품격은 징검다리 위의 양보처럼, 작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말없이 먼저 물러선 사람의 뒤에는, 단단한 내면과 관계의 지혜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상징자본은 천천히, 그러나 깊이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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