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참혹함을 담은 한 장의 그림, 그리고 권력을 향한 정치의 격렬함은 언뜻 보면 서로 다른 현실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의 공통된 진실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념이 아니라 생존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념이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정의와 같은 개념들은 오랫동안 인류가 문명을 이루며 지켜온 중심축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의 포화 속이나, 정치적 극단이 몰아치는 선거판 한복판을 마주하게 되면 그 모든 개념들은 무력해집니다. 생존이 위협받는 순간, 사람들은 고귀한 신념보다는 당장의 숨통을 틔우는 결정을 내리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이념의 도구화이자, 인간 조건의 벗길 수 없는 본질이기도 합니다.
가자지구의 참상은 단지 특정 지역의 비극이 아니라, 현대 문명이 끝없이 외면해온 원초적 현실을 드러냅니다. 피난을 가던 아이와 그를 품에 안은 어머니, 붕괴된 건물 속에서 울부짖는 생존자들, 그리고 그 곁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전쟁의 기계들. 이 장면은 어떤 정치 체제나 민족 갈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살고자 하는 몸의 절규입니다. 같은 시간대, 다른 대륙에서 벌어지는 대통령 선거 역시 유사한 논리를 따릅니다. 살아남기 위한 집단의 경쟁, 권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말살될 것이라는 공포, 그것이 바로 정치의 생물학적 기제입니다.
이념은 이제 더 이상 절대적 가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되는 기호로 바뀌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투표를 독려하는 표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안보’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며, ‘정의’는 언제든 서로 다른 목소리로 분열됩니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가치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으며, 절대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것조차 하나의 허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기대어야 할까요?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극단의 상황에 처한 인간은 정체성의 기반이 흔들리는 불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가 안전하다는 믿음, 나를 지탱해주는 사회적 역할, 소속감. 하이데거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세계 속에 아무런 준비 없이 내던져진 존재. 그 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이 모든 현실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탈이념적 생존주의입니다. 더 이상 인간은 하나의 신념으로 살지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 입장을 바꾸고, 생존에 따라 태도를 유연하게 조정합니다. 때로는 이를 ‘위선’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끝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삶은 언제나 이상과 현실 사이의 줄타기입니다. 이념은 우리의 이상을 말하지만, 생존은 우리의 현실을 말합니다. 지금 이 세계는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념의 시대는 저물고, 맨몸의 진실이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이 그림 앞에서, 그리고 이 정치적 격렬함 앞에서, 우리는 단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가?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본질적인 물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