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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질서의 재설계

by 최정식

스리랑카는 2009년 내전을 종결한 이후에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군인은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는 선언되었지만, 그 땅에는 여전히 총검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스리랑카는 지금 ‘전쟁 없는 평화’를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배적 질서의 연장선’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전후 군축을 촉구하는 다수의 국제 보고서들은 늘 예산의 비효율성과 전략적 불균형을 지적해왔습니다. 하지만 헨리 키신저가 말했듯, 국가는 늘 권력 질서의 유지를 본능처럼 추구합니다. 지금의 스리랑카에서 군대는 단순한 안보기관이 아니라, 내부 통치를 위한 질서의 중심축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북·동부 타밀지역에서는 군대가 지방정부를 대신하고, 일상경제를 장악하며, 문화경관마저 새로 쓰고 있습니다. 불교 사찰이 힌두교 사원 위에 세워지고, 마을 이름은 시나할라식으로 바뀌며, 타밀 공동체의 기억은 군화 발자국 아래서 지워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전통적인 ‘전후 복구’라기보다는, ‘전후 승자의 평화’, 다시 말해 하나의 민족이 또 다른 민족을 통제하는 질서로 읽혀집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키신저는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평화는 무엇인가?” 그가 보기에 진정한 평화란, 전투의 중단이 아니라, 상호 간의 질서 있는 공존입니다. 다시 말해, 전쟁이 끝났다면 그 다음엔 권력의 재조정이 따라야 합니다. 타밀 지역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단순한 군대 철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땅 위에 자율성, 문화적 존엄, 정치적 대표성이 복원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교훈은, 어떤 분쟁이 종결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평화가 설계되고 유지되고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스리랑카의 사례는 말해줍니다. 총성이 멈췄다는 이유만으로 평화가 도래한 것은 아니며, 평화는 단지 무력이 아니라 정당한 질서와 인정된 다양성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의 국제사회가 스리랑카에 요구해야 할 것은 단순한 군축이 아니라, 권력 구조 자체의 재설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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