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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정치학

by 최정식

조직은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정지된 기계가 아니라, 다양한 감정과 언어, 기억과 욕망이 교차하는 움직이는 장(場)입니다. 이 복잡한 생명체 안에서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갈등과 소통, 협력과 침묵의 뿌리에는 한 가지 공통된 개념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경계의 정치학’입니다.


경계란 단순한 구분이 아닙니다. 내가 지킬 것과 열어둘 것을 스스로 정하고, 상대의 선을 인식하며, 그 위에 관계를 조율하는 존재의 기술이자 권력의 언어입니다. 조직생활은 곧 이 경계 위를 걷는 일이기도 합니다.


업무의 경계, 책임의 경계, 말의 경계, 감정의 경계. 이 모든 경계는 가시화되지는 않지만, 서로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침묵의 규칙으로 작동합니다. 어떤 이의 경계는 부드럽게 열려 있어 협력이 쉬운 반면, 또 어떤 이는 견고한 성벽처럼 닫혀 있어 대화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능력보다 태도의 문제, 그리고 결국은 존재방식의 철학적 선택입니다.


특히 리더십이 교체되거나, 조직의 외부 환경이 급격히 흔들리는 시기에는 이 경계들이 더욱 민감하게 요동칩니다. 기존 질서에 익숙했던 이들은 자신의 경계를 방어하려고 하며,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고자 하는 이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열어 경계를 재설정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불편과 마찰은 때로 갈등처럼 보이지만, 실은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몸짓이며, 변화에 대한 응답의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조직이 성숙하다는 것은, 경계 없는 동질성을 강요하지 않되, 경계만을 이유로 단절하지 않는 태도를 갖추었다는 의미입니다. 서로의 경계를 알아보고, 그것을 존중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부드럽게 흔들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조직을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시키는 토양이 됩니다.


경계의 정치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타인의 경계에 어떻게 다가가고 있습니까?" 그 물음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는 조직, 서로의 경계를 가늠하며 조율할 줄 아는 문화, 그 안에서 우리는 보다 품격 있게 일하고, 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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