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각과 권력의 경계

by 최정식

회의실에서 나온 한 문장이 결재선과 예산을 타고 실행 단계로 옮겨가는 순간, 말의 성격은 달라집니다. 내부 논의의 대상이던 문장이 조직의 공식 언어로 편입되는 즉시, 관리와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이 지점부터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말이 힘을 얻는 자리에서는, 힘이 말을 선도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회의에서 도출된 제안이 결재를 통과하고, 예산·인력·일정이 배정되어야 프로젝트가 됩니다. 연결이 없다면 좋은 제안은 기록으로만 남습니다. 결국 현실로 건너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책임을 질 사람, 따라갈 절차, 투입할 자원. 이 세 요소를 묶어 일관되게 운용하는 틀이 곧 조직입니다.


다만 변환 과정은 항상 동일하지 않습니다. 같은 제안이라도 담당 주체, 시점, 이해관계의 결에 따라 전혀 다른 제도로 구현됩니다. 자율을 높이려던 규범이 감시 장치로, 시험적 혁신이 통제의 선례로 굳어지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봅니다. 말이 힘의 문법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의도는 축소되거나 방향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심리적 역학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제안이 채택된 당사자에게는 자기 확증 경향이 커지고, 팀에는 합의를 유지하려는 압력이 생깁니다. 반대 의견은 장애로 지각되기 쉽고, 비판은 줄어듭니다(집단사고). 반대로 제안이 배제된 당사자는 소속 위협을 방어하려 전체를 냉소적으로 해석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정서적 파동이 의사결정의 속도를 앞당기고, 사후의 이유 제시가 정당화를 뒷받침하는 양상입니다.


따라서 핵심은 거리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로고스(말·이유)와 크라토스(집행·힘)는 결합하되, 최소한의 간격을 둬야 합니다. 집행이 논리를 앞서지 않도록 기록과 근거를 남기고, 절차의 투명성을 확보해 해석의 과잉을 줄여야 합니다. 투명성은 미덕이기 전에 기억 장치이자 안전 장치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생각은 힘을 만나야 현실이 됩니다. 동시에 그 결합은 언제든 비틀릴 수 있습니다. 두 사실 사이에 얇지만 단단한 간격을 유지할 때, 아이디어는 교리로 굳지 않고, 권력은 폭력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말이 힘을 얻는 과정은 관리의 문제이며, 그 관리는 말과 힘 사이의 경계를 세우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상징정치